물컹한 지루함
KBS 방송국 뒷길로 천천히 걷다가 여의도 공원길로 접어들었다. 이른 아침이라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 시간여 정도를 똥냄새에 시달리다 보니 공원의 푸른 잎들이 뿜어대는 공기가 한층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몸속 깊이 몇 번을 공들여 심호흡을 하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아침 출근길 도로의의 팽팽한 긴장감과는 달리 도심 한복판에 있는 공원은 호젓하니 여유로워 보였다. 깔끔하게 잘 가꾸어진 화단에는 공원길을 따라 흰색, 노란색, 자주색 빛깔의 국화가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넓은 챙 모자로 얼굴을 반 넘어 가리고 마스크를 한 채 팔을 귀밑 근처까지 엇갈려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을 반복하며 공원 둘레를 산책하는 중년이 훌쩍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있었고. 무릎이 제멋대로 튀어나온 운동복 바지에 얇은 면 티셔츠에 빨간색 조끼를 느슨하게 걸쳐 입은 젊은 여자가 엷은 웃음기를 머금고 경쾌하게 공을 받아치며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비둘기 모이를 주는 젊은 여자와 모이를 먹으로 다가오는
비둘기 사이를 신이 나는 듯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도 보였다. 벤치에 앉아 공원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돌리다 보니 자기 또래의 젊은 남자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 군은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살아가는 것, 행복이라는 것, 희망이라는 것들은 다 잊어버린 듯 어느 순간인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그런 기억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삶에 대한 욕구가 자취를 감추고 나니 알람소리에 기대어 눈을 뜨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버텨야 하는 막역한 물음만 떠올랐었다. 내일에 대한 기대도, 누군가를 만난다는 설렘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느낌 앞에서 조차 물컹한 지루함이 난잡한 머릿속을 느릿느릿 유영하곤 했다.
어둡고 침침한 기억 한복판에서 나침판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사라진 나침판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주저앉아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무형의 시간들이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큰둥하고 허접하게 느껴졌다. 내 삶의 단상들이, 길을 걷다 다리가 아파서 쉬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던 길 멈추고 방향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오래된 기계의 건전지처럼 에너지가 소모되는 시점도 알려주지 못하고 그냥 순식간에 기계가 멈추어 버리듯이 그렇게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문뜩 회사일이 생각났다. 팍팍하고 딱딱한 사무실 속의 공기를 생각하니 다시금 머릿속이 띵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지금쯤 사무실에선 나의 지각을 질겅질겅 씹어대고 있겠지. 맘대로 들 해라. 대통령도 씹는 판에 그까짓 말단 직원하나 씹어 대는 게 뭔 대수라고, 나라고 회사 대표 이사 상무, 부장 즉 윗선에 있는 대장들 한번 안 씹어 봤겠냐.'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직장생활, 매일매일 지루한 반복이 십수 년 동안 이어지는 동안 책상 위에 서류더미 탁 던져놓고 손톱만큼의 미련도 없이 “저. 그만둡니다” 호기롭게 "하하하" 박장대소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오는 그날을 상상하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만큼 했었다. 그렇게 발작적으로 어쩌다 한 번씩 사표 한 장 멋지게 날리고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몇 년째 상상만 하고 있다 보니 고개 숙인 생각에 거미줄이 달라붙은 것처럼 자신을 더욱더 옥죄고 있는 듯 갑갑했다.
마치 입안에 덜 삶은 팥고물하나가 이리저리 나뒹굴어 신경줄을 팽팽하게 자극하듯, 오늘도 그런 날들 중에 하루가 아닐까? 김 군은 또다시 습관적으로 기어오르는 발작을 광고 전단지 접듯 구겨 넣으며 조금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