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난풀, 보지 못한 존재
숲 바닥에는 스스로 빛을 만들지 않는 식물이 있다.
수정난풀(Monotropa uniflora)은 광합성을 하지 않는다. 초록을 버렸고, 잎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짧은 시간 동안만 희고 투명한 모습으로 숲 아래에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식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전에 누군가 수정난풀을 발견했다는 장소를 찾아가 본 적도 있지만,
단 한 번도 이 식물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숲 바닥을 오래 들여다보았지만,
내가 마주한 것은 늘 낙엽과 흙, 그리고 이미 지나간 흔적뿐이었다.
그래서 수정난풀은 나에게, 있다기보다 늘 놓친 존재에 가깝다.
같은 숲을 여러 번 지나도 어떤 해에는 보이고 어떤 해에는 보이지 않는 식물이기에,
애초에 만나지 못하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대상처럼 느껴진다.
그 자리에 없었다기보다, 그 시간에 나와 겹치지 않았다는 쪽이 더 정확한 말일지도 모른다.
낙엽이 두껍게 쌓인 그늘 어딘가에 수정난풀은 있었을 것이다.
눈에 띄기 위한 색도, 오래 머물기 위한 형태도 없이.
이 식물의 삶은 드러나기보다는 이어지기 위해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해에도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숲을 지날 때마다, 보지 못했다는 기억만 또렷해지는 식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식물을 기생이라 부른다.
수정난풀은 광합성을 하지 않고, 균을 통해 탄소를 얻는다.
이 사실만 놓고 보면 이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식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만난 적 없는 존재에게, 나는 이미 하나의 말을 붙이고 있다.
기생이라는 말은 이 식물의 삶을 설명하기보다 그 곁에 먼저 도착해 있는 느낌을 준다.
숲 바닥에서 낙엽을 들추며 보이지 않는 존재를 떠올리는 동안, 이 말은 식물보다 앞서 나간다.
아직 마주한 적도 없는 삶에 우리는 너무 빨리 이름을 붙인다.
수정난풀의 기생은 눈에 보이는 파괴로 드러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쓰러뜨린 흔적도, 급격히 약해진 풍경도 남아 있지 않다.
이미 이어져 있던 연결 위에 조용히 놓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기생이라는 말은 이 장면에 정확히 걸리지 않은 채, 조금 비켜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생은 식물 세계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다른 식물에 몸을 기대 자라는 식물도 있고, 뿌리를 통해 양분을 얻는 방식도 여러 갈래로 나뉜다.
식물에게 기생은 하나의 살아가는 방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관계를 바라볼 때, 나는 어쩐지 이 한 단어가 모자라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받기만 하는 존재, 되돌려주지 않는 관계로 이 식물을 정의하기에는,
그 말이 너무 많은 장면을 건너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식물의 관계를 몇 개의 말로 나눈다. 기생, 편리공생, 공생.
누가 얻고 누가 잃는지, 주고받음이 있는지에 따라 이름을 붙인다.
이런 구분은 이해를 돕지만, 숲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관계는 이름보다 먼저 존재하고,
그 경계는 계절과 환경에 따라 조용히 흐려진다.
인간의 관계도 하나의 말로 고정되지는 않는다.
어떤 관계는 불균형해 보였다가도 시간이 지나며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우리는 관계를 설명하려 들지만, 그 설명은 늘 한 시점에 머문다.
주고받음의 크기와 방향을 따지며 안심하려 하지만, 그 계산은 오래가지 않는다.
자연의 관계 앞에서도 우리는 같은 질문을 꺼낸다. 이 관계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공정한가.
그러나 숲에서는 그런 질문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관계는 평가되기 전에 이미 지속되고 있고, 말은 늘 그 뒤를 따라온다.
수정난풀과 균, 그리고 숲의 관계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누가 더 얻었는지, 무엇이 옳은지와 상관없이 이 연결은 이어진다.
기생이라는 말은 그 곁을 지나가지만, 관계는 그 말 없이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