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라면 크리스마스

나의 크리스마스는 구상나무였다

by 루인

자주 가는 카페에 트리 장식이 걸리고,

길거리에 캐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비로소 12월이 왔다는 실감이 든다.


초록과 붉은빛이 가득한 거리에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하면

포인세티아와 호랑가시나무등 여러 식물을 떠올리지만,

나에게 크리스마스를 가장 선명하게 알려주는 식물은 언제나 구상나무(Abies koreana)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누구나 알지만,

그 나무의 이름이 ‘구상나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글고 짧은 침엽이 촘촘하게 붙어 있는,

한국에서 가장 흔히 트리로 쓰이는 바로 그 나무.


장식용으로는 흔하지만, 야생의 구상나무는 생각보다 훨씬 좁은 곳에서만 자란다.

그래서 산에서 마주친 구상나무는 내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제주도에서 처음 구상나무를 만났다.

구상나무를 보려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능선을 따라 오르던 길에 하늘을 향해 곧게 선 구과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동글동글한 솔방울이 위를 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구상나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람길 한가운데 서 있던 작은 나무에서는 은근한 송진향이 풍겨왔다.

도시에서 만나는 구상나무는 언제나 조명과 장식 아래 있지만,

야생의 구상나무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고요한 능선 위에서 스스로의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구상나무, Korean fir

구상나무의 서식지는 매우 좁다.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같은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평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알고 다시 떠올려보면,

한라산에서 처음 마주한 그 나무의 모습은 더욱 선명해진다.


크리스마스트리에서 느끼는 화려함과는 다른,

겨울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버티는 생명체만의 고집 같은 것이 있었다.


동시에 구상나무는 이 땅의 겨울을 오랫동안 견뎌온 존재이기도 하다.

빙하기가 물러난 뒤에도 더 추운 곳으로 갈 수 없었던 나무들이 마지막으로 남았던 자리,

그 좁고 높은 능선들이 작은 피난처가 되어 지금의 구상나무를 지켜왔다.


세계 어디에서도 자라지 않는, 학명에 붙은 koreana 라는 이름처럼

오직 한반도에만 남은 고유종이라는 사실도 그 존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몇 해 뒤 다시 한라산을 찾았을 때, 풍경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능선을 따라 서 있던 구상나무들 중 많은 나무가 잎이 말린 채 회색빛으로 서 있었다.

기후가 조금만 달라져도 가장 먼저 흔들리는 건

이렇게 높은 곳에 몸을 붙들어둔 생명들 인지도 모른다.


한라산의 구상나무 숲은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기온이 예전보다 높아지면서 차가운 공기를 오래 견뎌야 하는 이 나무들에게는

더 이상 머물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그 회색빛으로 서 있던 나무들이

마치 제자리를 잃어가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도시에 내려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한 트리들이 가로수처럼 줄지어 서 있다.

조명 아래 반짝이는 모습도 물론 예쁘지만,

산에서 본 구상나무를 떠올리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겨울을 밀어내기 위해 만든 빛과, 겨울을 품은 채 버티며 만들어내는 빛은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반짝이는 장식을 더할 때,

산의 구상나무는 아무 장식도 없이 자기 자리에서 겨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구상나무는 누군가가 겨울을 보내기 위해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화려한 장식을 두르지 않았는데도, 그 나무는 스스로 받아들인 겨울로 조용한 빛을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나만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화려한 조명으로 한 해의 끝을 밝히고,

누군가는 조용히 트리 앞에 서서 지나온 시간을 떠올린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때마다 이제는 먼저 산의 구상나무가 생각난다.

인위적인 장식 없이도 자기만의 빛을 지키던 그 나무의 모습이,

화려한 조명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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