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조각들

나이테가 고스란히 그려지고 있다.

by 청비

‘바스락 바스락’

어느 가을날, 그녀와 낙엽 위를 거니는 소리.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가끔씩 낙엽 밟는 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깰 뿐.


그녀는 깊은 고민에 사로 잡혀 있었다.

남편이 술과 도박에 미쳐 있다고 했다.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거의 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가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심정으로는 당장이라도 이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에

그 결심이 스르르 무너지고 만다고 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고 자책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했다.


남편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연민인지, 아니면 사랑인지에 대해서.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남편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파고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그런 감정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나는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누구는 유리 같아서 작은 충격에도 쉽게 산산조각 나고

누구는 스테인레스 같아서

어지간한 충격에도 그냥 찌그러질 뿐이라고.


마음의 변형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그들 앞에 턱하니 시련 하나가 놓였는데,

그녀의 감정이 예전과 똑같을 리 없었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전과 똑같은

온전한 감정이고 사랑일 리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분명 네 마음은 전과는 달라져 있을 거야.”

“남편에 대한 네 마음은 이미 변형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 마음이 온전하지 않아도 관계를 이어갈지는 네 몫이 되겠지.”


10년을 넘게 한 이불 덮고 살아 온 그들 앞에

큰 장벽이 놓여 있었다.


마음이 일그러진 관계라도 이어갈지 말지.

반쪽짜리 사랑이라도 붙들지 말지.

그 선택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그녀는 수심이 깊은 얼굴로

걷는 내내 땅만 쳐다보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네가 어떤 감정이든 지금 이 관계를 지속해 나간다는 건

분명 굉장히 어렵고 힘들 거야.”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내내

아직 그녀가 남편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네가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

하지만, 넌 적어도 최선을 다한 거잖아?”

난 그녀에게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술과 도박에 빠진 남편과 산다는 건

어리석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무 자르듯

관계를 도려낸다면

과연 그녀의 삶은 편안하고 행복할까?

최소한 감정이 남아있는 한 그녀는 내내 자신을 자책하느라

더 힘들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남편과의 관계를 유지할지

아니면 끊어낼지

그 건 그녀만의 선택이다.


남편과의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끊어낸다고 해도

그녀는 분명 후회를 할 것이다.

거의 폐인이 된 남편과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녀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겪어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길을 선택한다는 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은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때로는 그 관계로 인해 상처를 받고

후회를 하고 헤어지거나 참고 견디거나.


하지만, 그런 관계를 반복하면서

우리의 내면은 조금씩 성숙하게 변화되고 있지 않을까?


그녀는 오늘도 성숙해지는 중이다.


우리는 수많은 인연을 만나면서

조금씩 나이테를 그려가는 것이다.


내면 안에 한 살, 두 살......

나이테가 고스란히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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