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어느 수요일, 김 부장과 은혜 사이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다. 예쁜 머그잔 옆에 놓인 몇 권의 책이 그들의 즐거운 대화거리가 되었다. 커피숍 안 무수한 눈빛들이 그들의 테이블에 스포트라이트가 되었다. 그들을 향한 시선들은 먼 옛날 십오 촉 전등처럼 힐끗힐끗 꺼졌다 켜지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서로에게 집중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을 향한 스포트라이트에 신경 쓰는 일이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신경 쓰고 집중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아. 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일일이 신경 쓰는 일은 불필요한 것 같아. 불필요한 것에 에너지를 소비하는 건 낭비라고 생각해."
언젠가 김 부장이 은혜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후로 은혜는 일부러 타인의 시선을 흘러버렸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다 보면 어느새 삶의 주체가 흔들리게 된다. 나에게 집중하는 일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편협한 세상의 시선들을 외면하는 무심함이 필요하다.
"아저씨는 저의 유일한 친구예요. 전 늘 수요일 저녁을 기다려요. 아저씨를 만나 서로 책 리뷰도 하고 대화하는 시간은 제가 말이 많아지거든요. 그런 제가 저도 신기해요."
은혜는 김 부장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짓는다.
"늙은 나를 꼰대가 아닌 친구라고 해주니까 기분 좋은데? 오히려 내가 은혜한테 배우는 게 많아."
김 부장이 머그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은혜와 김 부장이 서점에서 처음 만나던 날, 은혜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라는 정문정 작가의 에세이집이었다. 김 부장의 가슴에 책 제목이 아프게 꽂혔다. 그동안 무례한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왠지 소녀에게 그 책은 무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방향대로 소녀가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독서모임을 갖기로 했다. 서로에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수요일 저녁 7시에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었다.
대부분 서점이나 커피숍이 만남의 장소였지만, 아주 가끔씩 저녁식사를 하기도 했다.
한 시간이 훌쩍 넘어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은혜는 절룩거리는 걸음걸이가 괜히 미안했다.
"아저씨는 창피하지 않으세요? 저랑 같이 있는 게......"
은혜가 고개를 푹 숙이고 김 부장에게 말했다.
"그런 생각이 바로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야. 주변을 봐. 푸른 잎 돋아나는 가로수, 정체된 도로, 높은 빌딩......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게 세상인데, 자꾸 그런 생각에 갇혀 있으면 되겠니?"
김 부장은 은혜와 나란히 걸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또각또각"
은혜의 파란 지팡이도 함께 걷는다. 군데군데 닳아지고 낡았지만, 여전히 파란색을 띠고 있었다.
수요일 저녁 풍경은 늘 바쁘게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로 가득했다.
"은혜는 꿈이 뭐니?"
김 부장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꿈이요? 저에게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전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은혜는 누군가가 물어봐 주길 기다렸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 그래서 은혜가 책을 많이 읽는구나? 그런데 소설가가 되려는 이유가 있어?"
김 부장은 예상치 못한 은혜의 꿈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소설 속에서는 상상한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되잖아요. 제가 상상한 이야기들이 현실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 읽혀서 희망이 되면 좋겠어요."
상상한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된다는 그 말에 김 부장은 가슴이 찡했다. 또 누군가에게 읽혀서 희망을 주고 싶다는 대답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혜가 사는 세상에는 엄마가 있고 아저씨가 있다.
은혜 엄마는 식품회사 생산직 2교대 일을 하며 살아간다. 늘 바쁜 엄마에게 은혜는 착한 딸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은혜는 단 한 번도 투정을 부린 일이 없었다.
출퇴근 시간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엄마의 고달픈 삶에 무게를 싣지 말자고 늘 다짐했다.
자신의 꿈에 대해 아는 사람은 오직 김 부장뿐이다.
은혜는 김 부장이 아빠 같은 친구지만, 아빠가 아니라서 참 좋다. 자신의 미래 얘기를 무거운 짐처럼 느끼지 않을 관계.
한 발짝 물러나 관망하면서 조언해 줄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서로 밀착된 관계는 각자의 무게가 있다. 특히 부모는 생의 대부분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은혜는 엄마가 그냥 나무로 살아가길 바란다. 어느 정도의 그늘을 만들어주지만, 나무 자체로 살아가는 엄마이길 바랐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닌......
김 부장이 역학조사관에게 자신의 2주간 동선을 먼저 고백했다. 그가 '서은혜'라는 소녀의 이름을 내뱉자 조사관은 은혜도 검사를 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서둘러 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은혜의 덤덤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회사 내 코로나 확진 사원과 밀접접촉자인 김 부장은 불안했다.
작은 소녀에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된 건 아닌지, 혹시라도 자신과의 만남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아닌지...... 별의별 상상이 천장으로 쏟아지는 밤이었다.
그날 밤은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했지만, 정작 김 부장은 두려웠다.
소설가가 꿈이라던 애어른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주변 지인들을 만나면 온통 주식이나 펀드 혹은 회사에 관한 지루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책이나 꿈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낯설다.
그들이 낯설게 생각하는 것들을 익숙하게 말하는 우리는 어쩌면 외계인일지도 모른다.
우리 둘만의 세계에서 우리 둘만의 언어로 대화한다.
김 부장은 더 이상 낯선 이방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학교 동창들이나 지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다.
김 부장은 아주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본 ET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ET와 엘리엇의 우정 어린 교류를 다루었던 SF영화.
외계인 ET가 엘리엇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항상 네 곁에 있을게.'라고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우주선에 탑승하는 장면이 뇌리 속에 각인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