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창가에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 뒤늦게 잠든 김 부장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어제 받은 코로나 검사 결과가 아침 일찍 문자로 통보된다고 했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에서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불안한 마음이 가슴 안에서 널뛰기 시작한다.
만약 확진 판정을 받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릿속이 온통 까맣게 물들었다.
그때였다.
'김선호 님의 코로나 검사 결과는 음성입니다.'라는 내용의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온몸이 스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2주간 자가격리 대상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확진 사원과의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어 내려진 결과였다.
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 음성인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검사는 꼭 받아. 그리고 난 2주간 자가격리 대상이라 당분간 못 만날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읽고 싶었던 책이나 실컷 읽으면서 쉬어야겠다."
김 부장이 자신의 검사 결과를 제일 먼저 은혜에게 알렸다.
"휴가 받으셨다고 생각하세요. 아저씨."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은혜의 목소리가 즐거웠다. 마치 자신에게 휴식이 주어진 것처럼.
"그래. 격리라는 단어보다 휴가라는 단어가 훨씬 듣기 좋지? 타의적 휴가라고 생각해야지 뭐."
"수요일이 기다려지지 않을 거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하하하."
김 부장은 괜히 너털웃음을 짓는다.
출근을 안 한다고 생각하니 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내 인생에서 김 부장이라는 키워드를 빼면 뭐가 남을까? 매일 아침 출근길을 동행하던 서류가방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과제처럼 느껴졌다.
2주동안 김 부장이라는 키워드는 사라진다.
발견하지 못한 나의 키워드를 찾아 기웃거리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선 김 부장으로서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 총무과 오 과장에게 연락했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야. 2주간 자가격리 대상 사원들이 있으니까 오 과장이 급한 업무들은 처리해 줘. 그리고 기분이 좀 찝찝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가 2주 동안 회사 식구들 말고 3명의 여자들을 만났거든."
"한 명은 벌써 연락해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라고 권유했어. 그런데 다른 두 명한테도 연락해야겠지? 내 결과는 음성이지만 영 마음이 안 놓여서 말이야."
김 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 과장이 놀란 듯 물었다.
"네? 세 명의 여자라고요?"
김 부장이 말한 문장 속에서 유독 세 명의 여자라는 단어가 오 과장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린 가끔,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는 버릇이 있다. 유독 다르고 낯선 것들에 신기해하고 주목한다.
김 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여자들'이라고 말한 것을 후회했다.
"설마 이상한 상상하는 건 아니지?"
"한 명은 어린 소녀야. 그리고 그 소녀의 엄마. 또 한 명은 내 철부지 여동생 있잖아. 작년에 이혼한......"
김 부장이 오 과장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휴~~~ 그랬군요."
오 과장은 자신의 상상이 물거품이 되자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 과장 기대에 못 미쳐서 미안하네. 하하하."
"무슨 그런 농담을 하세요?"
두 사람은 평소처럼 농담을 주고받으며 전화를 끊었다.
며칠 전 김 부장은 은혜 어머니를 만났다.
은혜를 만나는 동안 은혜가 미성년자라는 현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좋은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였지만 은혜 어머니를 만나 명확히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내 한 복판의 어느 커피숍 안, 은혜 어머니 유재화와 김 부장이 마주 앉았다.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해요."
김 부장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부장님 얘기 듣고 솔직히 좀 놀랐어요.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아이와 어른이 친구로 지낸다는 것이 쉽게 이해도 되지 않았고요."
재화의 목소리는 긴장한 듯 떨렸다.
"제가 배움도 짧고, 가진 것도 없고, 참 많이 모자라요. 은혜를 혼자 키우고 있지만, 거의 혼자 자란 거나 다름없어요. 자기 몸이 아파도 투정 한번 말썽 한번 부린 적 없는 착한 아이예요."
"제가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엄마라도 은혜한테 상처 주는 사람은 절대 용서 못해요. 은혜한테 들어서 잘해주시는 건 알지만,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재화는 말하는 내내 김 부장의 얼굴을 살폈다.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은혜는 참 착한 아이예요. 그래서 제가 배울 점도 많고. "
김 부장은 정중하게 명함을 건넸다.
한참의 대화 끝에 커피숍을 빠져나오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오늘, 재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혜 어머니, 저 김선호입니다."
통화 중간중간 기계 소음이 끼어들어 방해했다.
재화의 일터는 늘 요란스럽다.
'어머니, 저희 회사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검사 결과 음성이었지만, 혹시 몰라 은혜에게 검사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도 검사를 받으셨으면 합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김 부장은 재화에게 다시 한번 문자를 남겼다.
몇 시간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자, 김 부장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요란한 카톡 알림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사원 한 명이 자가격리 사원들의 단톡방을 개설했다.
무료함을 알리기라도 하듯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카톡 알림음.
갑작스러운 격리로 인해 세상과 단절된 자들의 아우성인 것 같았다.
집에 가족이 있는 자가 격리자들은 혼자 방에 갇혀 지내니 감옥이 따로 없다고 했다. 각자 수감된 감옥에서 소통의 연결고리를 꼭 붙들었다.
회계팀 이 차장은 와이프가 밥상을 서재방 앞에 차려 두었다고 했고, 홍보팀 강대리는 집안에서 가족들과 카톡으로 대화 한다고 했다. 김 부장은 갑자기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넓은 집안을 헤집고 다녀도 되고, 따로 수건을 쓰지 않아도 되고, 식기를 분류해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는 자가격리 사원들의 하소연이 부러웠다.
김 부장은 기러기 아빠다. 와이프와 애들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문득 가족이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오랜만에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Dad, i'm busy. call me later."
휴대폰 너머에서 아이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한 영어 문장이었지만, 낯설었다. 순간 아들이 한국과 영국의 거리만큼 멀게 느껴졌다.
거실 소파에 널브러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서글펐다. 지금 이 순간 혼자라는 현실이.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
허탈한 마음이 텅 빈 가슴속에 둥둥 떠다녔다. 이대로 널브러져 있다가는 점점 무너질 것 같았다.
모든 일상과 마음들을 일으켜줄 새로운 루틴이 필요했다.
나 - 김 부장=?
나의 키워드를 찾는 과제를 시작하기로 했다. 보물 찾기라도 하듯 샅샅이 뒤져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