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장은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입을 뗐다.
"은혜야, 아저씨가 대화할 때 일방통행인 사람이니?" 나영의 말에 충격을 받은 김 부장은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나만 모르는 또 다른 자신의 자아가 있는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는 좋은 친구예요. 만약 아저씨가 일방통행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통화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좋은 친구'라는 은혜의 말에 작은 위로를 느끼는 김 부장.
하지만, '일방통행'이라는 나영의 목소리가 가슴 언저리에 채기처럼 걸려있다.
'어쩌면 상대에 따라 대화법이 달라졌던 건 아니었을까?'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모든 게 괜찮다고, 이해될 거라고...... 그렇게 느슨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영은 일반적인 사람의 상식에 저울질을 해보면 기준치에 미달되는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나영에게 분노를 아낌없이 표출했는지도 모른다.
여과되지 않은 감정은 다소 불필요한 불순물을 담고 있다. 그 불순물의 결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골이 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전에 여과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혹 나의 감정에 지금 상황과 관련 없는 요소들이 끼어들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어느새 검붉은 노을이 창밖 도시 위로 내려앉았다.
"띠리리리리~~"
적막하고 쓸쓸한 공간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김 부장은 잠시 멈칫했다.
아직 지우지 못한 그 이름. '매제' 가재희였다.
놀람, 궁금함, 당황...... 순식간에 여러 감정들이 뒤엉켜 거미줄을 친다. 늘 그에게 미안했다.
매제는 자신만의 알고리즘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가정적이고 다정한 그는 인생의 목표가 '화목한 가정'이라고 했다. 처음 나영에게 그를 소개받은 자리에서 그 진부한 인생 목표에 김 부장은 흡족했다.
"여보세요?"
"응. 그동안 잘 지냈나?"
"네."
"그런데, 어쩐 일이지? 전화를 다하고."
"은결이 엄마한테 부득이하게 연락할 일이 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서요."
"아, 그런가? 저도 사람인데, 미안해서 그렇겠지. 염치가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그게 저......"
재희가 말꼬리를 흐리며 주저했다.
"나영이한테 하려고 했던 말이 아닌가? 내가 전해주겠네."
김 부장은 살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일주일 동안 해외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형님도 알다시피 제가 혈육이 없잖아요. 은결이를 안심하고 맡길만한 사람도 없고...... 은결 엄마 생각하면 절대 은결이는 맡기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은결이 엄마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을 남한테 맡기는 것도 불안하고......"
재희의 목소리는 바위를 내려놓는 것처럼 묵직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나영이가 보살펴야지. 걱정 말게. 나영이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출장 가기 전에 은결이 데려다줘. "
"네. 형님. 그럼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형님'이라는 호칭이 아직은 낯설지 않았다.
김 부장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나영에게 전화했다.
나영이 얼마나 기뻐할지 눈에 선했다.
"여보세요?"
목 늘어난 후줄근한 티셔츠 같은 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왜 그렇게 목소리가 다 죽어가니?"
김 부장은 또 부아가 치밀었지만,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내가 사는 게 그렇지. 뭐. 낙이 있겠어?"
나영은 자신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말했다.
"김나영! 정신 차려. 그런 모습으로 은결이 만날 거야? 매제한테 전화 왔어. 해외출장 가야 돼서 은결이 보살펴 달라고."
김 부장은 이 소식이 어두운 밤바다에 등대가 되기를 바랐다.
은결이의 존재가 나영에게 한 줄기 빛이라는 걸 잘 알기에.
"뭐라고? 은결이를 볼 수 있다고?"
나영은 갑작스러운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크게 놀랐다.
휴대폰 너머로 훌쩍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끈적거리는 나영의 눈물이 휴대폰 너머로 뚝뚝 떨어졌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 당장 밥도 먹고 청소도 하고...... 알았지?"
"그럼. 그럼. 당연하지."
나영은 갑자기 생기 돋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안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한다. 까맣게 타버린 낙엽처럼 온통 까만색 천지였다. 옷장을 활짝 열어젖혔다. 온장 전체에 어둠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3년 전의 어둠도 지금의 어둠도 고스란히 그곳에 남아 웅크린 채 나영을 바라본다.
"휴~~"
낮은 한숨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녀는 슬며시 옷장문을 닫았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까만 낙엽들만이 세탁실로 던져졌다.
그 후로 이틀이 지났다.
재희는 은결이를 나영에게 맡기기 위해 대전으로 갔다. 나영과 재희가 만나는 그 순간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영의 시선은 오롯이 은결이를 향해 있었다.
"엄마!"
은결이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영에게 와락 안겼다. 나영은 아무 말 없이 품에 안긴 은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다렸던 이 순간, 아팠던 모든 순간들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영의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물, 재희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말없이 사라졌다.
서재에 쌓인 오래된 먼지들을 닦고 있는 김 부장.
쾌쾌 묵은 먼지들을 닦아내자, 네이비 컬러의 책장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띠리리리리"
휴대폰이 울리자, 김 부장은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오 과장?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김 부장은 회사에 급한 업무가 있는지 물었다.
"저...... 그게......"
"아니,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자꾸만 말을 흐리고 머뭇거리는 오 과장이 못마땅했다.
"저 지금 외근 중인데요. 부장님 매제를 제가 몇 번 봐서 얼굴을 알잖아요. 재혼할 여자가 있는 것 같아서요."
"싱글인데, 재혼을 하든 삼혼을 하든 문제 될 거 있나?"
"그게 아니라, 우연히 커피숍에서 그 여자랑 둘이 하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여자가 애는 죽어도 못 키운다고, 자기가 3년을 기다렸다고 더 이상은 못 기다린다고 하더라고요."
"뭐라고? 오 과장이 뭔가 오해를 했나 보네. 내 동생은 작년에 이혼을 했고, 이혼 사유는 내 동생이...... 아니 됐고! 어쨌든 오 과장이 착각한 거야."
김 부장은 오 과장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한참 허공을 바라봤다.
삶의 목표가 '화목한 가정'이라고 말했던 그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른세수를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바르고 성실한 사람, 적어도 재희는 김 부장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은 각자 타인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이미지화해서 저장한다. 한번 저장된 이미지가 아주 오랫동안 뇌에 각인된다. 간혹 그 이미지가 오류였거나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해도 부정하고 싶어 한다.
객관화된 관점으로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타인보다 자신을 더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오 과장의 말이 착각이라고 단언했지만, 머릿속이 심난했다. 서재에 널브러진 책들처럼 마음이 어수선한 김 부장.
어둠의 그림자가 서재문을 열고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