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시리즈 <낯선 도시의 향>

by 서하

나의 걸음마는 제주라는 이름을 가진 따듯한 섬에서 시작됐습니다.



낮은 언덕이 전부인 제주의 남쪽 섬에서 뻗어온 나의 가지는 이제 막 인천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제주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나의 가족과 친구와 숱한 사랑 모두를 그곳에 두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불 켜진 나의 독립심은 당시 나의 고민을 마비시켰고, 결국 나는 인생 2막이라는 이름의 대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맡았던 대도시의 향기는 꽤 고통스러웠습니다. 담배 냄새와 술 냄새로 자욱한 길거리, 쉴 새 없이 오가는 사람들, 꺼질 줄 모르는 곳곳의 불빛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나는 좌절했습니다. 당장의 불안과 걱정이 미래의 기대와 설렘을 앞질렀습니다. 그때 내 마음을 아리게 한 것은 '이런 곳에서 나는 나로서 살 수 없겠다.'라는 일말의 불안이 만든 걱정이었습니다. 실패와 후회를 반복했던 내게 다시 한번 더 실패가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겨우 눈앞의 카페로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차가운 카페인이 나의 위를 자극하자, 익숙한 무언의 감각이 들었습니다. 필연적으로 나는 지금의 감정을 기록해야겠단 마음이 나의 손끝에 닿았습니다. 남루한 크로스백에서 노트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노트에 글을 남기는 것은 내가 아닌 나의 무의식이었습니다.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짜와 요일을 시작으로 펼쳐진 문장은 나의 좌절과 미래를 향한 두려움을 지나, 스스로의 탐구로 이어졌습니다. 고민하던 문장의 마침표를 찍고 다시 한번 카페인을 들입니다. 차가웠던 나의 커피가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후였습니다.


다시 본 그날의 글엔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며, 어떤 삶을 꿈꾸고, 바라보는지에 대해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제주에서는 쉽사리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아마 내 모든 게 있는 제주는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충분했기 때문에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이곳에 나의 것이라곤 가방과 노트, 휴대폰뿐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특별한 존재도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부재는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날 나는 진심을 믿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진심은 무엇보다 강하다는 믿음은 나의 대동맥과 같아, 오늘의 나를 살리고 내일의 나를 살립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진심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진심으로 글을 쓰는 나는 강하단 걸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주를 벗어나 얻은 첫 번째 지혜였습니다.



내게 제주의 향은 비온 뒤 돌담 냄새로 기억됩니다. 예고 없이 내린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을 보면 제주의 날씨는 역시 예측할 수 없구나, 늘 경험하면서도 새삼 깨닫습니다. 구름 없이 맑은 날은 제주에게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골목 곳곳에 얕은 물웅덩이가 있습니다. 맑은 하늘이 비쳐 보입니다. 물웅덩이 속 세상에 대해 떠올립니다. 그곳 역시 구름이 몰려와 비가 내리고 이내 맑게 개겠죠.


제주의 향은 골목에서 시작됩니다. 돌로 쌓은 담 사이 골목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내게 스며듭니다. 축축한 풀 냄새와 멀리서 느껴지는 생명력 질긴 꽃의 냄새, 그리고 바닷바람. 변덕 심한 제주의 날씨를 지고서야 느낄 수 있는 제주의 향기입니다.


대도시로 건너온 나는 제주의 향이 그립습니다. 맑은 날 사이 하필 비가 오는 날이면 제주의 향을 좇아 집을 나섭니다.



지금은 이 도시에서 보낸 지 한 달 정도 되는 시기입니다. 첫날 나를 아프게 만들었던 거리를 여러 번 걸었고,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연결되며 언젠가부터 이 도시가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도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구나, 짧은 탄식과 함께 오늘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날 내가 노트에 적은 마지막 문장은 “이 거대한 도시에서 나는 나와 비슷한 온도의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였습니다.


대도시의 향은 여전히 쌀쌀하기만 합니다.


나는 단지 나를 향한 마라톤을 달리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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