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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글 Sep 18. 2022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법

본인의 위치에 따라 방법은 달라진다

예전에 근무하던 기관에서 나는 2년 단기 계약직 위촉연구원으로 입사해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위촉연구원들끼리의 경쟁 면접을 통과하여 2년을 거의 채우고 역시 계약직이긴 하지만 전문연구원으로 승진 아닌 승진을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나와의 경쟁에서 떨어져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위촉연구원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또 다른 글에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전문연구원으로 일하다 보니, 정부의 방침 상 계약직의 비율을 줄이라는 대승적 움직임이 있었다. 연구기관도 그 흐름에 따라 기존 계약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운 좋게 나는 무기계약직인 전임연구원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모종의 알력관계에 의하여 나는 입직한 지 5년 차가 되는 해에 운 좋게 정규직 선임연구원으로 승진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 지리하고 긴 과정과 세월 동안 내 업무능력을 인정받아서 그렇게 된 것은 2할 정도뿐인 것 같고 나머지 8할은 정부 방침, 윗사람들 간의 알력 등등 순전히 운에 의해서인 것 같다.


이렇게 석사급 연구원으로 일하는 동안, 타 부서장이 본인 부서의 과제를 함께 하자고 직접 제안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부서 간 칸막이를 타파하고 일 잘하는 연구원을 본인 부서의 연구과제에서도 활용하겠다는 취지인데, 이에 대해서 거절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저희 부서장님과 상의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너무나 명쾌하고 상큼하고 명확한 답변이다. 나는 타 부서장인 당신과 업무를 함께 할지 관여할 권한과 의무가 없으며 연구원 내에서 제공하는 나의 모든 노동력은 내 부서장 관할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결국 부서장은 자기 부서원이 자기 부서의 업무가 아닌 타 부서의 업무를 맡는 만큼 자기 부서의 업무를 신경 쓸 여유가 줄어들기 때문에 부서장과 의논하면 타 부서의 업무를 맡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게 뻔하다. 타 부서장이 내 노동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요구에 우아하게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이다.


후속 질문으로, "부서장 생각은 그 사람 생각이고, 너의 개인적인 견해는 어떤데"라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 역시 동일한 답변을 들려주면 된다. 나는 내 노동력의 쓰임을 결정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내 개인적인 견해는 중요치 않으며 모든 것은 내 부서장과 상의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피력하면 된다.


문제는, 내 부서장이 타 부서장의 요구를 들어주는 경우 생겨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일단 석사급 연구원으로서 일개 부서원일 때에는 이런 발언으로 난처한 상황을 손쉽게 그리고 예의 있게 모면할 수 있었다.


상황이 복잡해진 것은 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중간관리자급이 된 다음부터이다.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박사학위자는 하나의 연구조직으로서 자율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일을 할지는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만 주체성 있는 연구자라는 평판을 얻게 된다. 박사학위를 받고, 또 중간관리자급이 되면서부터는 타 부서장의 요구에 대해서 내 부서장과 상의해 보겠다는 답변이 먹혀들지 않는다.


바로 며칠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타 부서장과 함께 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질문을 임원진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그 발언의 속뜻은, 나를 타 부서로 전보 발령시키고자 하는 의사가 있으니 본인 의견이 어떠한지 떠보려는 것이었다. 나는 적지 않이 당황했다. 더 이상 "부서장님과 상의해보겠습니다."라는 답변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질문을 준 임원급 인사와도 척을 지고 싶지 않고, 나와 함께 일을 하고 싶어 하는 타부서장에게도 악감정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지만 제의를 확실히 거절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을 받은 면담 자리에서는 애매모호하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주고야 말았다. 타 부서로 나를 인사이동 조치시켜도 나는 받아들이겠다는 다소 긍정적인 시그널을 준 셈이 되었다. 허나 나는 현재 상사인 부서장과 함께 계속 일을 하고 싶지 언급된 부서장과는 업무를 하기 싫었다. 속내를 비추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어색한 관계가 되기 싫어서 나도 모르게 인사이동을 시켜도 된다는 견해를 펼친 게 되었다.


나는 임원급 인사와의 면담이 끝난 후 바로 나의 상사를 찾아가 임원급 인사와 나눈 이야기를 브리핑하여 보고했다. 그리고 내 속마음은 이러한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개인적인 견해를 주십사 요청했다. 나의 부서장은 임원급 인사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하고(인사이동을 확정하기 위해 본인의 의사파악을 하고자 찾아온 것)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조언을 주었다. '본인의 의견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나는 앞서 나를 찾아온 임원급 인사를 찾아갔다. "아까 하신 말씀에 대해서 제가 시간을 두고 숙고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저는 타 부서장인 그 박사님을 인간적으로 존경하지만 업무적으로는 얽히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결국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그 상황이 벌어진 바로 그 당시에 적절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면, 곧바로 찾아가 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질문이 날아온 당시에 "제가 좀 더 생각해보고 답변드리겠습니다."라고 시간을 벌었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팁은 믿을 만한 상사를 찾아가 그 상황을 보고하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함께 의논하라는 것이다. 나는 운 좋게도 소속 부서의 부서장이 그 믿을만한 상사였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믿을만한 사람을 만들어놓는 것이 쉽지 않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저절로 믿을만한 사람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본인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 믿을만한 아군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평판이 좋아야 한다. 다음 글은 좋은 평판을 만들고 유지하는 법에 대해서 쓸까 한다.


그러면 이 글의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부서원급이라면 업무상 협업 및 인사이동 조치와 같은 곤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본인의 속내는 내비치지 않고 "부서장과 논의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말로 상황을 일단 모면하고 시간을 벌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부서원급이 아닌 부서장에 준하는 급이라면,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본 후 답변드리겠습니다."라는 말로 시간을 벌고, 믿을만한 사람과 상의하여 생각을 정리한 후 답변을 하는 방법을 차용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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