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일 「돌다리」와 영화 <원더>
돌다리
하재일
짜장면 배달부가 그릇을 찾으러 와도
선생님께선 꼭 문 앞까지 나가서 배웅하신다
화장실 청소하는 늙은 아주머니께도,
당직실을 지키는 위탁업체 경비원 할아버지께도,
파릇파릇한 공익근무 요원인 청년에게도,
먼저 말을 걸며 똑같이 허리를 굽히신다
그만큼의 거리를 지키며
그만큼의 목소리 높이로
그만큼의 그림자를 각도를 유지하며
개울가 다리 위에서 경계를 지운 세 사람이
크게 웃으며 지나갔다는, 옛날 여산廬山의 다리를
나는 매일매일 건너다니는 느낌이다
선생님께서 놓으신
시냇가의 경계 없는 돌다리를 생각한다
아직도 그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분이 있다. 나의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이셨던 총각 선생님. 조상조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 반은 ‘사랑의 교실’이 되었다. 참으로 어진 분이셨다. 우리 열한 살짜리들을 한없이 귀하게 대해주셨고 금보다 소중하게 여겨주셨다.
선생님의 얼굴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선생님의 인자하심, 선생님의 밝으심, 선생님의 겸손하심, 선생님의 친절하심은 내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 시 「돌다리」를 읽으며 나는 단박에 조상조 선생님을 떠올렸다.
짜장면 배달부가 그릇을 찾으러 와도 / 선생님께선 꼭 문 앞까지 나가서 배웅하신다 // 화장실 청소하는 늙은 아주머니께도, / 당직실을 지키는 위탁업체 경비원 할아버지께도, / 파릇파릇한 공익근무 요원인 청년에게도, / 먼저 말을 걸며 똑같이 허리를 굽히신다
‘도처에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다. 참된 선생님들의 공통된 특징이야말로 이것인 것 같다. ‘지금 여기에서 마주하는 모든 이들을 스승으로 대하는 것.’ 「돌다리」에서 묘사된 선생님의 모습이 꼭 그렇다. 짜장면 배달하는 분에게도 화장실 청소하는 아주머니께도 외탁업체 경비 할아버지께도 젊디 젊은 공익근무 요원에게도 ‘먼저 말을 걸고 허리를 굽히’신다. 이것은 동료 교사를 대하는 것을 넘어선 극 존경의 태도이다.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선생’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조상조 선생님이 그런 분이셨다. 자신의 학생들을 지극한 존경으로 대하셨다.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과학 실험 수업을 한창 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비커에 있던 물질을 손으로 찍어 맛을 보셨다. 수업의 열정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하신 행동 같았다. 잠시 뒤 선생님의 표정을 보던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소리쳤다.
“와, 선생님 얼굴 빨개지셨다!”
그 말을 듣고 더 빨개지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붉어진 얼굴로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시던 선생님. 아, 그 웃음은…… 우리들 한 명 한 명을 한없이 소중하게 대하셨던 큰 사랑이었다. 열한 살짜리들이 얼굴이 빨개진 선생님 앞에서 까르르 웃던 교실, 그곳은 천국이었다.
3학년 때까지 나는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는 아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선생님의 교실에서는 한 번도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아이였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행복인 줄조차 모르는 행복’을 느끼며 지냈다.
1학기 기말고사 시험 후에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은 짝끼리 시험지 답을 맞추게 하셨다. 짝이 채점한 시험지를 받아 든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맞게 쓴 답 두 개에 엑스 표시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짝에게 왜 맞은 걸 틀리게 채점했냐고 따졌더니 ‘고쳤으니까 틀린 거’라고 우겨댔다. 내가 선생님 앞으로 뛰어나가 억울해하며 말했다.
“선생님! 저 90점 넘었는데, 짝이 잘못 채점했어요. 여기 좀 보세요.”
선생님께 시험지를 내밀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선생님이 ‘이건 답을 고쳐 썼기 때문에 맞은 것으로 해줄 수 없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다고. 시험지를 보고 난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며 씨익 웃으셨다. 아, 지금도 그려지는 그 웃음. 선생님은 내게 왜 답을 고쳐 썼느냐고 묻지 않으셨다. 고개를 갸웃거리지도 않으셨다. 그저 나를 믿어주시는 웃음을 보이셨다. 이윽고 선생님이 빨간 색연필로 두 문제에 동그라미를 크게 쳐주셨다. 95점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처음 우등상장을 가져다드릴 수 있었다.
영화 <원더>에도 멋지고 좋은 선생님들이 나온다. 선천성 기형으로 태어난 어기 풀먼이 5학년이 되어 처음 학교에 갔을 때 만난 브라운 선생님과 투쉬만 교장선생님이다.
어기는 태어난 후 몇 번의 성형수술을 한 후 ‘훨씬 잘생겨’졌지만 그건 부모님의 관점일 뿐이었다.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 수치스러운 어기는 등교 첫날 우주인 헬멧을 쓰고 학교로 향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을 든든히 지원해주는 부모님과 누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기는 홀로 전쟁터에 나선 군인처럼 교문을 들어선다. 자신을 외계인 또는 괴물처럼 쳐다보는 시선과 사투를 벌이다 마침내 교실로 들어선다. 이때 천군만마 같은 브라운 선생님을 만난다.
브라운 선생님은 칠판에 명언을 적어놓고 아이들에게 공동체성을 길러주는 교육을 하신다. 첫날의 명언은 이것이었다.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하라.”
선생님은 ‘자기에 대해 두 가지씩 이야기하자’며 먼저 자신은 설명한다. “나는 월가에서 금융업 일을 했어. 그러다가 원래 꿈이었던 교사가 되고 싶어서 학교로 왔어.”
선생님이 “누가 다음으로 이야기해 볼래?”라고 묻자 줄리안이 나서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곤 나서는 아이가 없었다. 브라운 선생님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어기에게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 어기는 얼굴 표정으로 거부 의사를 강하게 전한다. 브라운 선생님도 얼굴 표정으로 다시 강하게 부탁한다. 어기가 자연스럽게 반 아이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기는 마지못해 일어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27번이나 수술을 받았어. 나는 과학을 좋아하고, 나에겐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개 데이지가 있어. 세 가지나 말했네, 미안.”
브라운 선생님 덕분에 어기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5학년이 돼서야 학교에 나오게 된 이유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첫날 브라운 선생님이 써준 명언, “옳음과 친절함 중에서 친절함을 택하라”는 말을 인상 깊게 들었던 여학생 썸머는 어기가 절친이었던 잭과 오해가 생겨 다시 외톨이가 됐을 때 어기에게 다가가 친구가 돼 준다.
나도 담임을 맡았을 때 브라운 선생님처럼 명언을 활용해서 아이들에게 생활교육을 하곤 했었다. ‘서두름이 악마를 발명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착한 이리와 악한 이리가 있다. 착한 이리에게 더 먹을 것을 많이 주는 사람이 되라’ 이런 명언들을 칠판 맨 위에 두 주 정도 적어놓았다. 아이들이 먼 훗날에라도 삶 속에서 필요한 순간 명언이 떠오르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한 일이었다.
투쉬만 교장선생님도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어기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줄리안이 부모님과 함께 교장실에서 학교폭력 처분에 대해 상담할 때였다. 줄리안의 어머니는 ‘못생긴 아이한테 장난 좀 한 것 같고 처벌받는 건 억울하다’며 그동안 내왔던 기부금을 취소하겠다는 암시를 하기도 한다. 줄리안이 어기를 괴롭혔던 증거들을 보여준 뒤 투쉬만 선생님이 말한다.
“어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태어났습니다. 어기는 자신의 외모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투쉬만 교장선생님은 기부금보다 정의를 더 중시했다. 줄리안의 부모는 학교를 떠나겠다고 한 뒤 아들을 데리고 나가 버린다.
「돌다리」에는 ‘여산(廬山)의 다리’라는 말이 나온다. 자료를 찾아보니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한 스님이 여산의 돌다리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로 원을 세웠다. 어느 날 친구인 유학자와 도사가 찾아와서 함께 대화를 나눴다. 그들을 배웅하며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 무심결에 스님이 돌다리를 넘어가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스님은 마음속에 세웠던 경계가 깨진 것을 깨닫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만큼의 거리를 지키며 / 그만큼의 목소리 높이로 / 그만큼의 그림자를 각도를 유지하며 // 선생님께서 놓으신 / 시냇가의 경계 없는 돌다리를 생각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관계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만큼의 거리를 지키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는 저마다 ‘적절한 거리’가 있다. 직장 동료 사이에도, 친구 사이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하물며 부부 사이에도 지켜야 할 거리가 있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거리’ 또는 ‘그만큼의 거리’다. 그 거리에서 조금 먼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조금 섭섭할 뿐이다. 하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관계에 탈이 난다. 상대의 선을 침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상대를 침해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모를 때 일어난다.
4학년 때 나는 선생님께 무례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꽤 건방지고 자기중심적인 말이었다. 무서운 선생님이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다. 나의 무례한 언동으로 인해 선생님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그때 나를 혼내지 않고 그냥 넘어가 주셨다.
얼마 뒤, 내가 했던 행동과 관련이 있는 내용을 수업하실 때였다. 선생님이 반 아이들을 향해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얘들아, 선생님 얘기 좀 들어 볼래…?”
선생님은 나와 선생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신 뒤, 내가 했던 말을 아이들과 내게 다시 들려주셨다. 그 말을 듣고 난 아이들이 “어우” 하며 탄성을 질렀다. 중요한 것은 그 탄성이 결코 나를 비난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시간에 나를 책망하거나 나무라는 시선이나 태도를 보인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그런 일을 당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할 뿐이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나 죄책감과는 다른 것이었다. ‘아!’ 내가 선생님을 아프게 해드렸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아프게 다가왔다.
선생님은 어린 학생에게 상처를 입으셨을 때도 ‘그만큼의 거리’를 지켜주신 분이었다. ‘그만큼의 목소리’로 나의 존재를 지켜주시면서 나의 행동만을 나무라셨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애롭게. 선생님의 ‘그만큼의 그림자’가 너무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