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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BOM Jan 26. 2024

똥맛 된장은 있었지만 된장맛 똥은 없었던 걸로.

며칠 전, 작년 더현대에서 했던 라울 뒤피 전시회에서 샀던 공책에 나의 발작 버튼에 대해 가감 없이 썼다. 회사 생활하면서 속상하고, 열받아서 눈물 차오르던 순간도 다 적어봤다.

처음 회사 생활을 하던 때로 돌아가도 봤다.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서 왜 그때 그 선택을 했는지 원망스러워서, 스스로 한 번은 긍정할 이유를 찾고 싶었다.


20대 중반부터 뭘 해야 할지 몰랐지만 학생 신분이 끝났다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의 존엄은 스스로가 버는 돈으로부터 온다는 신념 아래 일단 아무 곳이나 갔다. 하지만 버는데도 가난한 것 같았고, 전문성을 갖출 수 있는지는 더더욱 의문이고, 아무 데도 이직도 못하다 잘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전문직이나 공무원, 공기업에 들어갈 시도를 한 번도 안 한 게 바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진짜 나에게 남은 건 정말 가까스로 모은 잔고뿐일까?', '일은 정말 나에게 상처만 남겼을까? 상처뿐인 영광... 도 아니고 상처뿐인 걸까?' 하고 질문을 던져봤다.


이제, 나름대로 경제적인 이유 제외하고 일이 나에게 남긴 영광만을 쏙 뽑아 정리해 본다.


1. 서툴지만, 모든 서비스와 물건이 나오기까지의 수고로움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 서비스, 일명 '재화'는 최종, 진짜 최종, 최최종, 최종_마지막의 버전을 거쳐 나오는 거였다. 학생 때 아르바이트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치열한 결정 과정을 직접 겪어 보면서 반건조 오징어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또 성숙해지기도 했다. (숙성된 반건조 오징어가 됐달까... 각설하고!)

책으로 접했었던 에이전시니, 플랫폼이니 비즈니스 형태를 그 안에서 직접 겪어보는 건 또 다른 차원이었다.

비즈니스 유형에 따라 일하는 방식이나 사람들 성향은 확연히 달랐고. 회사의 규모에 따라서도 달랐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한참 적은 경험이었고, 아프고 부딪치는 일 투성이인 날도 많았지만 '어른'의 세상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순진해서 불만을 품었던 것들, 아무 생각도 없었던 지점은 흐려지고 종종 물건과 서비스 너머의 누군가에게 감사한다.


2. 세상은 요지경이지만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여유가 생겼다.

솔직히 여유가 생겼다고 말하기는 민망하다. 그래도 '절대'라는 거, '완벽'이라는 거는 없고, 세상은 요지경이고 불공평하고 엉망진창이지만 또 그 와중에 굴러가긴 굴러간다는 걸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던 것 같다. 나의 여유엔 한숨이 90%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에 스스로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3. 효과적으로 일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혔다.

사기업은 다른 조직들보다 효율성을 더 많이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조직 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진행 상황을 빠르고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그중 하나가 앱이다.

일의 진행상황을 공유하는 앱으로는 지라(Jira), 플로우(Flow), 아사나(Asana) 등을 써봤고,

대화는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쓰는 카카오톡부터 라인(Line), 슬랙(Slack), 플로우(Flow-플로우는 채팅 기능도 있다.)를 써봤다.

코로나 때는 미팅이 어려우니 구글 미트(google meet) 혹은 줌(Zoom)을 써봤고,

일정 관리와 공유를 위해서는 네이버와 구글 캘린더(google calander)를,

자료나 게시판 용으로는 노션(Notion)을 썼다.



이런 앱들은 성과를 내기까지 효과적으로 일정, 자료, 진행 상황 등을 서로 공유하고, 개인적인 영역을 존중해 주기 위해 회사에서 채택하는데 아마 혼자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앱들을 써서 일을 관리해 볼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일정과 일의 진행 정도, 메모를 효과적으로 남기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고, 이는 회사 밖에서도 내 개인적인 일을 관리하기에도 좋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써봤던 앱 중에 요즘 가장 핫한 노션(Notion)은 기업용은 유료지만 개인용은 무료라 아직도 종종 사용하는데, 읽었던 책이나 일정이나 투두리스트(to do list) 등을 넣어놓고 체크해 둔다.

회사 업무를 관리하듯이 빡빡하게 하진 않지만 확실히 개인적으로 결심했던 일도 무턱대고 미루거나 안 하고 포기하는 태도를 조금씩 다듬기에 효과적이긴 하다. 이를 테면, 책을 사놓고 1년도 너끈히 읽지 않았는데 적어도 2주에 한 권은 읽는 걸 보면 효과가 있긴 있다.

그 외에도 연관된 것끼리 폴더를 정리하는 방법은 드라이브나 외장하드를 정리할 때 많이 유용하다. (별거 아니지만, 예를 들면 폴더에 1., 2. 와 같이 번호를 매기는 방법 등) 여담으로 외장하드에 사진은 최소 연도와 월까지는 폴더를 만들어 보관해 놓는데, 해가 갈수록 헷갈리지 않고 그때의 시간을 들여다볼 수 있어 열어볼 때마다 간편하게 추억을 찾을 수 있어 행복하다.

앱별로 기능이 다 다르니 익히는 번거로움도 있었고, 종종 뭐 하러 이런 앱을 쓰는지 모를 순간도 있었지만 여러모로 내 일상을 잘 쓸고 닦아 빛내줄 수 있는 팁을 얻게 된 건 사실이다.


4. 최대한 긍정적으로 오해의 여지없이 말하고, 상대의 이야기에서 화두를 뽑아 이어갈 줄 알게 되었다.

웃기 싫은 순간에도 웃으면서 말해야 하는 게 고역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점을 꼽자면, 친구들에게도 말을 좀 더 예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전에도 막말을 했단 뜻은 아니다. 하지만 솔직함을 내세워하고 싶은 말을 와락 내던지기보다 한 템포 쉬면서, '내가 이 말을 하는 게 나 좋자고 떠드는 건가, 아니면 진짜 저 친구가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가?'를 고민해 보게 됐다. 또, 카카오톡에선 비언어적 표현이 없이 글만 전달되는 거니 어순, 띄어쓰기, 주어, 목적어 가급적 제자리에 넣어줄 수 있으면 다 넣는다든지... 아주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을 한 번씩 더 다듬어서 전송하게 됐다.


부끄러워도 고백하자면 내 할 말이 많아서 남의 이야기는 잘 안 듣는 사람이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글도 쓰고 싶어 하고, 브런치를 하게 된 건 좋은 점이지만 다른 사람이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내 할 말에만 집중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인데, 이거는 고치려고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어서 '소통'관련된 영상을 많이 찾아봤다. 그리고 얼마 전, 아주 조금이지만 달라졌다고 느꼈다. 소개팅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물어봐가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예전 같으면 그러진 못했을 텐데 그렇게 얘기를 하다 보니 나름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록 소개팅은 결과적으로 망했지만...)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무슨 경험을 말하면, '나도 거기 갔었는데, 어땠다~'처럼 내 경험으로 끌고 오기보다 그 친구의 이야기에서 다음 이야기를 물어본다든지, 그래서 너는 어땠는지 등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그 사람이 이미 하고 있는 말에 조금은 더 중점을 두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이야기를 할 때 소통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친구들을 보면 갈길이 까마득하다고 느끼긴 하지만 분명 의미 있게 달라지고 있다고 느낀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냐'라는 속담이 있다. 그냥 스쳐 지나가면서도 보면 알 걸, 꼭 겪어봐야 제정신 차리겠냐는 뜻이다. 뭐, 진짜 그런 일이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술, 도박, 이성에 빠져 사는 사람을 굳이 연인으로 둬서 고생하면서 '아, 저런 사람 다시 만나지 말아야지.' 하는 경험은 필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된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비록 너무 삭혀서 혹은 그때는 숙성이 덜 돼서 아니면 입맛에 맞지 않아 똥맛이 났을지라도 먹어봤기 때문에 감사도 하고, 이해도 조금씩 넓혀가고, 배려의 가치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아는 게 아니라 진짜로 몸과 마음에 익혀간다.


프리랜서는 혼자 일하기 때문에 부딪치며 아플 일이 조직에서 일하는 것만큼은 강하지 않지만 만약 운이 좋아 내가 처음부터 프리랜서를 했다면 아마 지금보다는 EQ는 덜 발달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된장을 먹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똥맛 된장은 있어도, 된장맛 똥은 없었던 걸로, 나름의 결론을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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