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의 통찰로 바라본 생의 변곡점
여러분은 특별히 좋아하시는 주종이 있으신가요? 저는 크론병에 걸려 술을 거의 못 마시는 형편입니다. 제가 함께 술자리를 하는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교 1학년까지만 해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셨었는데요. 하나는 여자친구와 술상자와 함께 새벽녁 기숙사에 들어가다 정학을 먹었었습니다. 놀라운 친구였지요. 허나 얼마전 만났던 제 오랜 친구들의 간들은 안타깝게도 2년전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한 병도 다 마시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간은 2년간 많이 상해있더라구요. 아쉽습니다.
갑자기 술 하니까 생각나는데 또 하나는 바텐더가 되겠다고 고등학교 2학년부터 헛소리를 하다 지금은 전국 바텐더 공모전 당선 이후 호주로 유학을 가버렸습니다. 그때 저에게 눈을 반짝이며 바텐더의 꿈을 이야기했을 때에 진작 미친 놈인줄 알았는데 진짜 저질러버리는 것을 보니 실제로는 더 미쳤더라구요. 저는 의대 특성화 고등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고등학교를 나왔었는데요. 그 학교는 말그대로 모범생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제 친구들만 이상합니다. 저는 제가 완벽한 정상인이라고 자부하지만 유유상종이라고 주위 친구들을 보면 가끔 의심이 될때도 있어요. 이외에도 더 괴상한 친구들이 많은데 이야기가 너무 곁다리로 새어나가는 것 같아 오늘은 이쯤 하겠습니다.
<어나더라운드>는 토마스 빈터베르라는 덴마크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이자 명배우 매즈 미켈슨이 협업해 아카데미상까지 타낸 드라마 장르의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있으니 꼭 한 번 봐보면 좋을 것 같아요.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프닝은 술을 진탕 퍼마시고 덴마크 전통 술게임을 하며 난동을 부리고 즐거워하는 덴마크 청소년의 모습을 비추는데요. 북유럽 특유의 맑은 백야 같은 분위기와 즐거움에 휩싸여 광기를 보이는 너무나도 어린 소년, 소녀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이상한 위화감을 가져다 주고, 곧 검은 화면이 뜨며 원제 DRUK가 크게 점멸합니다. 저는 원제가 깔끔하고 임펙트도 있어 더 좋았네요. 그리고 놀랍게도 이 장면은 배우가 아닌 실제 학생들의 음주 장면을 담았습니다. 덴마크는 우리나라와 달리 이른 나이에도 음주가 법적으로 가능한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이었죠.
주인공 마틴은 수업에도 크게 열정이 없고 아내와의 관계도 지지부진한 중년의 교사입니다. 그의 교사 친구들 토미, 피터, 니콜라이와 마틴은 혈중 알코올 농도를 0.05%로 유지하면 사람이 더 활발해지고 창의성도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이야기하다 몸소 그 실험을 해보기로 결정하죠. 마틴은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한 결과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더 과감해지고, 수업도 더 재미있어져 아예 생활과 성격이 바뀌는 수준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토미와 피터, 니콜라이도 그렇죠.
하지만 그들이 술을 끝까지 마셔보기로 작정하면서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됩니다. 토미는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술에 취한 마틴과 싸우던 아내는 자신의 외도 사실을 무심결에 말하며 가정이 파탄나버립니다. 토미는 결국 자살로 죽게 되는데요. 토미의 장례식 이후 졸업식날 남은 마틴과 친구들은 소름끼치게도 토미를 위해 건배합니다. 신난 학생들 앞에서 마틴은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춤을 추다 바다로 다이빙하는 듯한 마틴의 정면을 순간포착하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상하게 찝찝하고 달콤씁쓸한 광기와 도저한 절망, 술을 마신 뒤 숙취가 몰려오는 듯한 기분만이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영화를 해석해보겠습니다. 영화의 내적 요소들로만 한번, 외적 요소들까지 포함해 한번 해석하겠습니다. 영화 내적으로 질문 두가지를 던질 수 있는데요.
하나는 마틴의 심리입니다. 마틴은 왜 술을 끊지 않았을까요, 혹은 못했을까요? 이는 마틴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틴은 술에 취한 뒤 몰려오는 기분 좋은 감정을 즐기기 위해 술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술을 마시고 마틴과 아내의 대화에서 마틴은 지속적으로 아내에게 예전의 나로 되돌아가겠다는 말을 합니다. 시간은 흘러가고 지나가지만 마틴과 마틴의 아내는 젊었을 적의 혈기 넘치던 사랑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고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외도로 마틴은 술로 이를 극복하려 했지만 결과는 가정의 파탄이었죠. 마틴은 중반부 영화의 분위기가 급박하게 변하는 시점 아내와의 싸움에서 더이상 예전의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돼라고 취한 채 반복적으로 괴성을 지릅니다.
고통속에서 그는 마침내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활기찬 수업을 위해 술을 마시기를 멈춘 마틴의 마지막 수업에서 학생이 선생님 오늘 다른 사람 같아요라고 하자 천천히 아마도,라고 답하는 대사도 같은 맥락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데요. 첫번째 관점은 결국 술을 매개로 젊었을 적의 혈기왕성한 성격으로 돌아가는 것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마틴이 다시 술에 손을 대고 광기의 춤을 추는 결말로 보는 관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월의 흐름을 인정한 마틴이 적절한 음주를 통해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로운 춤을 추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또 하나의 질문은 과연 이 영화는 술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술의 유혹을 이기지 못 하고 난동을 부리는 마틴, 알코올 중독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토미, 토미의 죽음 앞에서 다시 술에 손을 대는 친구들, 술로 인해 가정이 파탄난 마틴을 보면 <어나더라운드>는 술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험 때마다 긴장에 떨어 낙제하는 학생에게 술을 권해 합격을 유도하는 니콜라이, 마지막 장면에서 술을 매개로 용기를 얻어 아내와의 관계를 봉합해보려 하는 마틴, 술에 취한 토미의 활기찬 수업을 통해 토미를 존경하게 된 학생, 숙취에 찌든 상태로 조용히 마틴에게 아내와 다시 잘 해보라고 충고하는 토미에 대한 묘사는 <영화가 술을 마냥 부정적으로 그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합니다. 감독은 술 자체보다는 술을 매개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가는 중년이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는지를 그렸다고 보아도 좋겠죠.
여기까지가 내적인 해석이고 이제부터는 영화의 외적인 요소들과 이를 통한 해석을 바라보겠습니다. 감독 빈터베르는 영화를 촬영하기 4일전 딸을 교통사고로 잃습니다. 술에 대한 찬가를 담았던 기존의 각본은 딸은 잃은 아버지의 절망과 딸이 영감을 준 해당 각본으로 영화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감독의 의지가 뒤섞여 재탄생합니다. <어나더라운드>에 도저한 절망과 이를 딛고 일어서려는 주인공들은 이런 감독의 개인사가 상당 부분 반영된 결과물이죠.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한 학생들은 딸 이다의 친구들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은 중년의 위기를 술을 매개로 한 사회실험으로 극복하려는 40대들, 이라는 다소 가벼운 외피를 쓴 생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과 절망을 마주한 인간의 사력을 다한 춤사위로 변화합니다.
그렇다면 해당 시선으로 영화의 뛰어난 엔딩을 다시 봅시다. 감독은 딸과의 마지막 추억을 담은 영화를 찍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마틴은 학생들의 졸업식날 그가 영화 내내 거부해왔던 춤을 춥니다. 춤이 끝나면 영화도 끝나고 딸을 떠나보내야 하죠. 빈터베르는 마틴처럼 다시 나아가야 하니까요. 마틴이 바다로 점프하는 순간 영화의 프레임은 멈춥니다. 영화적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딸을 떠나보내기 싫은 아버지의 마음이 투영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이렇게 감정적인 해석으로 보아도 엔딩은 훌륭하지만 냉정히 연출적으로만 보아도 훌륭한 부분이 있습니다. 프레임이 멈추는 연출은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유행했었습니다. 이 연출은 관객을 영화의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어 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죠. <어나더라운드>에서는 관객이 아니라 감독이지만요. 국내에서는 비운의 천재,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의 엔딩에서 사용된 바 있는 유서깊은 연출 방식입니다. 사장되었는 줄 알았는데 반갑더군요. 영화와도 잘 어울리구요.
깔끔한 연출과 배우들의 명연기 또한 영화의 강점입니다. 미켈슨은 본인의 댄서 경력을 영화에 십분 발휘해한 놀라운 연기를 펼쳤네요. 연출적으로 더 언급하자면 음악이 영화의 상황과 반어적으로 다가와 오히려 큰 충격을 주는 여러 장면들. 씁쓸한 장면에 흐르는 신나는 음악과 배우들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 연기도 인상깊었습니다. 토미의 죽음을 토미가 타고 갔던 배에 홀로 남은 토미의 개로 보여주는 장면은 잔잔한 음악, 화창한 날씨 묘사와 대조되는 강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네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언급하자면 영화 초반에 자막으로 나오는 쇠렌 키르케고르의 명언이 있는데요. 그는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저서로 절망과 실존주의를 탐구했었죠. 영화의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셈입니다.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서 아쉽네요. 관련 영상과 자료는 보았는데, 완벽히 영화와 접목시키지를 못해 쓰기는 애매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시면 더 깊이 있게 <어나더라운드>를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마침 최근에 개봉한 마블의 <썬더볼츠*>도 쇠렌 키르케고르의 철학을 참고했었기도 하고요.
절망과 재기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은 영화. 영화의 씁쓸함과 달콤함에 지독한 숙취를 느끼게 만드는 영화.
토마스 빈터베르의 <어나더라운드>였습니다.
평점 4/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