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0일~ 12월 22일
후지타 카즈히로의 흑박물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초승달이여 괴물과 춤추어라를 완독했다. 이 작가는 요괴소년 호야나 가라쿠리 서커스 같은 굵직한 명작을 남긴 일본 만화계의 거장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거칠고 역동적인 펜선과 인물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뜨거운 연출로 유명하다. 흑박물관 시리즈는 그가 성인 지향 잡지에서 연재한 프로젝트로 런던 경시청 지하에 실존하는 범죄 자료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스프링갈드와 두 번째인 고스트 앤 레이디를 거쳐 이번 작품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역사적 사실에 자신의 기발한 상상력을 덧입혀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해왔다.
이번 초승달이여 괴물과 춤추어라는 세계 최초의 SF 소설로 평가받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작가는 메리 셸리라는 실존 인물의 삶과 그녀가 창조해낸 괴물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후지타 카즈히로는 평소에도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나 용기 그리고 유대를 그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이번 시리즈 역시 그가 가진 장점이 극대화된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고전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사실 페미니즘은 자칫하면 지나치게 교조적이거나 딱딱하게 흐를 수 있는 소재다. 하지만 후지타 카즈히로라는 필터를 거치자 이 주제는 그 어떤 액션 만화보다 뜨겁고 강렬한 서사로 탈바꿈했다. 메리 셸리의 어머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근대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작품의 핵심 동력으로 삼은 점이 놀라웠다. 여성에게 강요되던 억압과 편견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메리의 모습은 작가 특유의 열혈적인 감성과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작가는 메리 셸리가 겪었던 시대적 한계와 그녀가 쓴 소설 속 괴물의 처지를 연결하며 소외된 이들의 연대라는 가치를 끌어낸다. 괴물을 단순히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하지 않고 사회적 타자이자 거부당한 존재로 그려냄으로써 메리가 괴물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이런 전개는 원작 프랑켄슈타인의 철학적 깊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만화적인 재미와 현대적인 메시지를 동시에 잡은 환상적인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실화와 상상력의 배합 역시 일품이다. 19세기 영국의 분위기와 당시 문단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철저한 조사에 근거한 생동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 도사린 기괴한 음모나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전투는 만화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실제 역사 속에 이런 비화가 숨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이야기의 이음새가 매우 매끄럽다.
여기에 후지타 카즈히로의 그림체가 주는 마력은 몰입감을 배가시킨다. 그의 그림은 정교하고 예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인물의 표정 하나하나에 영혼을 담아내는 듯한 강렬한 힘이 있다. 특히 전투 장면에서 잉크가 사방으로 튀는 듯한 연출이나 인물의 일그러진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은 다른 작가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매력을 가진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작가의 에너지가 독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결말까지의 전개가 매우 깔끔했다는 사실이다. 보통 이런 방대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은 후반부에 힘이 빠지거나 수습하지 못한 복선들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행본 분량 안에서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다. 초반의 수수께끼부터 주인공들의 감정적 해소까지 군더더기 없이 전개되어 다 읽고 난 뒤에 그 어떤 미련도 남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완벽한 마무리를 보여준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초승달이여 괴물과 춤추어라는 고전의 재해석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 중 하나를 보여준 명작이다. 작가의 필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며 서사적 완성도와 주제 의식 그리고 시각적 쾌감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 후지타 카즈히로의 팬은 물론이고 밀도 높은 서사와 강렬한 캐릭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메리 셸리가 펜을 들고 세상과 맞섰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춤추듯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련된 감각으로 재탄생한 고딕 호러의 진수를 맛보고 싶은 이들에게 망설임 없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