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6일~ 2026년 1월 2일
칩 즈다스키가 집필한 데어데블 시리즈는 현대 그래픽 노블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약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연재된 이 시리즈는 맷 머독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고뇌와 종교적 색채를 가장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국내에는 지옥을 지나 천국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초기 연재분들과 대규모 이벤트인 데블즈 레인이 정식 발간되어 독자들과 만났다. 이 시리즈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맷 머독이 자신의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정체성을 고민하는 초기 단계와 엘렉트라가 데어데블의 이름을 이어받아 활동하는 중기 그리고 뉴욕의 시장이 된 킹핀과의 전면전을 다룬 데블즈 레인으로 이어진다. 칩 즈다스키의 연재가 끝난 이후에는 살라딘 아메드가 작가를 맡아 새로운 데어데블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으며 즈다스키가 남긴 거대한 유산은 데어데블이라는 캐릭터의 역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이정표가 되었다.
직접 읽어본 칩 즈다스키의 데어데블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흡입력이 엄청났다. 데어데블이라는 영웅이 가진 가장 고유한 특징인 가톨릭 신앙과 그로 인한 죄책감이라는 테마를 이야기의 중심에 단단히 박아 넣고 시작한다. 법을 수호하는 변호사이면서 동시에 법망을 피해 밤거리를 누비는 자경단원이라는 모순이 종교적 고뇌와 맞물려 폭발하는 과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맷 머독이 자신의 정의가 과연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하며 고통받는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그에게 깊이 감정 이입하게 만든다.
또한 킹핀 윌슨 피스크에 대한 다각적인 조명은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였다. 단순히 힘센 악당이나 범죄의 제왕을 넘어 뉴욕의 시장으로서 합법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고뇌하며 자신의 사랑과 야망을 지키려 애쓰는 인간적인 모습은 킹핀이라는 캐릭터를 한층 더 입체적으로 완성했다. 빌런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느끼는 분노와 좌절이 충분히 이해되게끔 설계된 시나리오는 즈다스키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엘렉트라가 맷 머독의 의지를 잇기 위해 살인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데어데블로 활동하는 서사는 매우 신선했다. 기존의 엘렉트라가 가진 냉혹한 암살자의 이미지와 데어데블의 불살 주의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드라마는 작품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큰 축이었다. 또한 맷 머독의 가공된 형제였던 마이크 머독이 현실 세계에 실체화되어 나타나는 설정이나 킹핀보다 더 높은 곳에서 뉴욕을 주무르는 초거대 자본가 가문인 스트롬윈 형제들의 등장은 작품의 스케일을 한껏 키워놓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아쉬움도 분명히 존재한다. 마이크 머독이라는 캐릭터는 맷 머독의 인생에 큰 파문을 던질 것처럼 화려하게 등장했고 스트롬윈 가문 역시 킹핀마저 압박하는 압도적인 위압감을 보여주었다. 특히 스트롬윈 형제들이 뉴욕을 통째로 굶기려 하거나 무력으로 제압하려 할 때는 이들이 이 시리즈의 최종적인 흑막으로서 대단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무게추가 데블즈 레인이라는 이벤트로 쏠리고 킹핀과의 직접적인 대결에 집중되면서 이들의 존재감은 초반의 기세에 비해 다소 흐지부지된 감이 있다.
마이크 머독의 경우에도 그가 가진 존재의 불안정성이나 맷 머독과의 복잡한 관계가 더 깊게 파고들어 갈 여지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중심에서 밀려나 소모적인 역할에 그쳤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스트롬윈 형제들 또한 킹핀을 각성시키는 일종의 장치로만 사용되고 정작 그들의 야욕이나 영향력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마무리가 다소 급하게 이루어진 느낌이 든다. 거대한 악을 상정해놓고 결국은 익숙한 숙적과의 대결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오는 힘 빠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즈다스키의 데어데블 런은 이런 몇몇 아쉬움을 덮고도 남을 만큼의 성취를 거두었다. 맷 머독의 내면세계를 가장 깊숙이 파고들었으며 엘렉트라를 통해 데어데블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재정의했다. 또한 킹핀과의 길고 긴 악연을 데블즈 레인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장엄하게 갈무리하는 과정은 그래픽 노블 팬들에게 잊지 못할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일부 조연 캐릭터나 초기 악당들의 마무리가 아쉽긴 하지만 전체적인 서사의 흐름과 주제 의식의 관철이라는 측면에서 이만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시리즈는 흔치 않다. 데어데블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고유의 맛을 가장 잘 살린 작품을 찾는다면 주저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수작이다. 비록 지옥을 지나 천국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지만 그 끝에서 마주한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운 보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