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갑자기 보따리를 쌌다. 도저히 답답해서 안 되겠단다. 어디 가서 일주일 쉬었다 오겠다고 나선다.
점심 잘 먹고 30분 만에다. 그동안 답답해하던 것은 알고 있었다. 여행이라도 가라 해도 '봐서'라는 답만 하던 아이다.
나를 닮았다. 훅 들어오면 엉겁결에 저지르는 것이.,.
딸아이는 프리랜서 번역가다. 혼자 집에서 일한다. 번역만 하는 일이다. 사람 만날 일이 없다. 원래 돌아다니는 걸 안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냥 집콕인 생활이다. 거의 1년을 집에만 있으니 답답함이 수위를 넘었나 보다. 집순이지만 한계에 다른 것이다.
강원도를 가겠다고 나선다. 버스 타고 간다는 애가 짐이 장난이 아니다. 혼자 짐 들고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는 티를 낸다. 가서도 일을 해야 된다고 노트북을 챙겼다. 덩치께나 있는 노트북 거치대, 자판까지다. 거기에 자기가 쓰는 물건을 넣은 가방이 또 있다. 먹던 식이섬유와 단백질 파우더는 통째로 넣었다. 이미 혼자 들고 갈 용량은 넘었다.
영종도쯤으로 타협했다. 가면서 레지던스 호텔을 예약했다.
일주일 후에 데리러 가기로 약속했다. 짐만 내려 주고 급히 야근을 하러 출근했다.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왔다. 급히 오느라 교정기를 놓고 왔단다. 피곤하지 않으면 내일 갖다 줄 수 있겠냐다. 에미가 뭔지.. 그러마 했다. 그렇게 물려서 영종도 놀기 0.5일을 했다.
그날 저녁 다시 야근을 들어갔다. 이번에는 급히 가느라 옷이 없단다. 을왕리 가서 조개구이 사주겠단다. 미안하니까 꼬드기는 거다. 또 에미가 뭔지.. 야근이 끝나고 옷가지를 챙겨 갔다. 조개구이도 먹고, 을왕리 가면 가던 카페 블랑에서 밀크티도 마셨다. 영종도 놀기 0.7일을 했다.
주일에 예배 끝나고 데리러 가기로 했다. 체크아웃 시간이 안 맞아서 1박을 더 하라 했다. 주일 오후에 인천공항 구경을 갔다. 공항 안 가본 지 오래라 가보자 했다. 딸아이가 4년 전 독일에 갔다가 몸이 못 견뎌 돌아오고 처음이다. 딸아이는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유럽소도시 여행을 가보자 한다. 열심히 살아 보자고 한다. 그렇게 영종도 놀기 1박을 더했다.
요양원 일을 하면서 여행은 못 간다 생각했다. 어찌하다 보니 영종도를 오가며 놀았다. 주변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여행 간 기분은 다 내 봤다. 예전 같으면 내 유리몸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중간에 요양원 일을 하며 영종도를 오가며 놀다니... 내 생각보다 몸이 많이 좋아졌음을 확인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난봄까지는 생각도 못하던 시간들이다. 내 몸도 힘든데 딸아이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회복되지 못한 몸이었다. 취업은 꿈도 못 꾸었다. 그런 상황은 아이를 더 힘들게 했다.
아이의 그런 모습은 또 나를 힘들게 했다.
감사하게도 딸아이는 카카오와 계약을 했다. 정확히는 카카오의 자회사다. 취업을 포기하고 전문번역가 되었다. 일을 시작하고 딸아이는 회복에 가속도가 붙었다. 딸아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나도 일을 시작했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 얼마나 할 수 있을까 했던 일이 반년을 채워간다. 그리고 건강을 얻었다. 몸도 마음도 회복되는 놀라운 시간들이다.
삶에 너무 지쳤었다.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는 그만 살아도 되겠다 했다. 살아야 하니까 사는 줄 알았다. 어쩔 수 없이 살았다. 내 삶에 무슨 즐거운 일이 있을까 했다. 살아보니 아니다.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생긴다.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여행 같지 않은 여행도 하면서 말이다.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내 삶의 여정에 또 어떤 즐거운 일이 기다릴까. 기대된다. 힘든 시간들을 지났다. 덕분에 작은 일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능력을 얻었다. 소소한 일에서 얻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작은 일들이다. 그 작은 일들이 삶을 충만하게 한다. 살아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