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망 Jan 10. 2024

상처를 치료 받는 곳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이 치료한다.

나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대한민국, 아니 세상의   어느 여자도 피할 수 없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많은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 상처를 치료 받고 있다.


어릴때부터 유난히도 주변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세상 모든 어른들은 내 편인줄 알았다. 당연히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했던대로 사랑을 드리고 살갑게 굴면 시어머니도 내 편인줄 알았다. 친정어머니도 당신에게 하듯 시어머니께 하라고 당부를 하셨었다.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시어머니라고만 생각해서 고부갈등이 있는 거라고. 먼저  다가가라는 말씀이셨다.


엄마도 나도 착각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안되는 일이었다. 아들을 빼앗아간  며느리였다.  예쁘게 봐줄래야 봐 줄 수 없는 존재였다. 이미 마음으로 무조건 못마땅하기로 작정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노력하고 애쓰는 만큼  그 상처가 커지기만 한 것이다.


남편 역시 언제나 시어머니가 먼저였다. 자기 어머니에게 며느리 노릇할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한 사람이었다. 항상 우리가 이룬 가정보다는 자기 집안이 먼저였다.  어린 나이에 혼자 사랑인줄 알고 착각했던 선택이었음을 깨달은 때는 한참 뒤였다. 나는 자기 집안의 하녀로 필요했던 존재였다.

그렇게 받은 상처들이 점점 깊어가고 곪아갔다.


친정엄마에게 자주 작은 선물들을 했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엄마가 좋아하시겠다 싶으면 천 원짜리라도 사다드리고는 했었다. 항상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엄마는 좋아하셨다. 주변 어른들에게도 길에서 산 작은 브로치라도 찾아뵐 때면 선물을 드리고는 했었다. 어른들 역시 당신을 생각하고 기억해 주는 마음이라고 너무 좋아하셨다. 당연히 시어머니께도 선물을 드렸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비싸지 않은 브로치나 스카프를 몇 번 사드렸다. 사치하고, 낭비하는 아이라고, 당신 아들 돈을 함부로 쓴다고 야단을 맞았다.


나는 엄마와 팔짱을 끼고 걸었다. 어릴적 어른들도 같이 걸을 때 팔짱을 껴드리면 좋아하셨다. 연세가 많으신  친척 어른들은 넘어질까 싶어서였다  어른들과 걸을 때 그냥 나도 모르게 팔짱을 끼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시어머니라고 조금은 어려웠는지 처음부터 팔짱을 끼지 않았다. 결혼하고 얼마 안되서 함께 종로에 가게 되었다.

시어머니와 나들이도 나온 그 길이 좋았던가 보다.  나도 모르게 시어머니의 팔짱을 꼈다. 말 그태로 바로 확 뿌리치는 것이었다. 그 때 어머니  표정은 나하고 살이 닿는 것조차 싫다는 듯했다.


어렵게 큰 아이를 낳고 얼마 안되서였다. 영아산통이 심했던 아이는 밤마다 못자고 울어댔다. 남편은 원래도 밤늦게까지 거실에서 tv를 보는 사람이다. 애가 밤새 울어대니 자연스럽게 거실에서 tv를 보다 잤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자야 출근을 하니까. 우리집에 오셔서 주무시고 가신 시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당신 아들을 거실에서 자게 한다고 화를 내셨다.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수화기 너머로 분노가 그대로 전해졌다. 애가 울어서 같이 못잔다 했다.

내가 애를 데리고 거실에서 자야지 당신 아들을 거실에서 재운다는 것이었다. '너는 네 아들이 중해도 나는 내 아들이 중하다' 이 말씀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알츠하이머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를 내가 모셔와서 10년 가까이 모셨다. 내가 어머니를 모셔온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누구에게도 말 못한 이유는 어머니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였다. 잘잘못을 떠나 그냥 미안했다 한마디면 내 상처가 나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나도 내 마지막을 맘 편히 살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를 보는 차가운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갑자기 떠나셨다. 치매 환자도 가끔 제정신이 돌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더 화가 나셔서 폭력이 심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치매 때문이라 했다. 오래 모시다  보니 눈빛과 표정을 보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치매로 폭력이 심해질 때도 있었다. 제정신일때 당신이 처한 환경이 너무 화가 나서 정신 나간척 하시고는 더 폭력을 휘두르셨다. 아마도 당신이 늘 하시던 말씀 때문에 더 화가   나시지 않았을까 싶다. ' 나는 네 신세 질 일 없다' 이 말씀과 함께 당신이 하시고 싶은대로 다 하셨다.  나는 그렇게 상처를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랜 시간 앓았다. 10년 가까이 시어머니 병수발을 하며 몸도 마음도 병들고 지쳤다. 그보다 더 한 것은 결국 관계를 풀지 못한 허망함이었다. 그 매듭을 풀고 내 상처가 회복  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마지막 삶을  멋지게 살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고 3년을 보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가 되었던 시간은 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이러다 마지막  순간을 만나겠구나라는 절박함이 나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 했지만 집에서 살림만 하던 60 가까운 여자가 할 일은 없었다. 나이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한 곳 뿐이었다. 시어머니 때문에 엉겁결에 따놓았던 요양보호사의 길이었다.  기저귀 냄새 맡기 싫어 절대로 안하겠다 했지만 막다른 길이었다.


그렇게 나는 5개월차 요양보호사가 되었다. 요양보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은 3가지다. 집으로 찾아가는 재가, 주간보호센터, 요양원이다.  요양원을 택했다. 실습할 때 요양원이 제일 마음이 편했던 기억 때문이다. 생각보다 일은 어렵다. 결국 몸을 써야하는 육체노동이다. 거기에 어르신들의 정서지원도 해야하는 감정노동이다. 그런데 최저시급이라니!


몸도, 마음도 약한 내가 이 곳을 견딜 수 있을지 싶었다. 하는데까지 해 보자고 버티다 보니 반년을 채워 가고 있다.

모자란 사람이라 도와주는 이들이 많은 덕분이다. 거기에 가장 큰  것은 어르신들의 사랑이다. 처음에는  어르신들께 다가가는 것이 힘들어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시어머니에게 받았던 상처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움츠러들었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어르신들과 친해졌다. 나를 보며 활짝 웃어주시는 모습, 야간 근무 때 안자고 돌아다니다고 애가 타서 당신 옆에 누우라고 자리를 만들려 하시는 분, 반팔을 입고 일하는 나에게 춥다고 팔을 문질러 주시며 '추운디 워째 이리 짧게 입었냐 ' 걱정해  주신다. 그 어르신들로 내 마음의 벽이 무너졌다. 시어머니께 못 떨어본 애교 원없이 해보자는 마음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드렸다.  어느 순간부터 어르신들의 비축식량이 내 앞치마 주머니에 꽂아지기 시작했다. 믹스커피 1개, 사탕 1개, 귤 1개. 가장 많이 주시는  것은 간식으로 나오는 두유다.  한 눈 찡긋거리시며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 주시면 물방울 다이아라도 받은 듯 좋아라 해드린다. 그런 내 모습에 어르신들 얼굴은 또 함박꽃이 된다.


가끔 인지가 좋으신 어르신들은 이런게 뭐라고 그리 좋아 하는척 하냐고 고맙다 하신다. 여기서나 늙은 내가 이렇게 관심 받고 사랑 받는 거라고 하신다. 내가 더 감사하다고 한다. 건강하게 계셔서 내가 푼수짓 하는 거 다 받아주셔서.

치매가 심하신 어르신들도 눈을 맞춰 드리면 웃으신다. 손을 내밀어 만지려 하시면 손도 잡아 드린다. 자주 볼을 비벼 드리면   너무 좋아서 까르르 웃으시는 어르신도 계신다.

내 손길이 무엇이길래 이리도 기뻐하시며 어린아이처럼 좋아 하실까.


시어머니께도 사랑 받으며 알콩달콩 살고 싶었다.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을 요양원에서 일하며 이루고 있다. 그렇다.

나는 요양원에서 상처를 치료 받고 있다.  받고 싶었던 사랑, 주고 싶었던 사랑을 마음껏 나누며 내 아픈  상처는 회복되어 가고 있다. 요양원에서 일 하는 것이 막다른 길이라 생각했다, 요양보호사라는 일은 결코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떠밀려 온 길이다. 그 길이 사랑의 길, 회복의 길이 되고 있다.


어르신들도 이 곳에서 상처를 치료받고 있다. 자식들에게서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아픔,  삶에서 내던져지고, 모두가 떠나갔다는 상실감을 치료 받는 분들이 많다. 요앙보호사도 결국 돈 벌자고 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어르신들을 돌보는 분들에게는 존경심마저 든다.

어르신 한분 한분 특성을 기억하고 항상 따뜻하게 돌보며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어떨 때는 움츠러들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그 손길을 통해서 어르신들의 상처가 회복된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료한다.



   

작가의 이전글 사는 날까지 살아 있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