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빗속을 걷는 기억

비가 내리면, 잊고 지낸 나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by 정 영 일

[새벽, 빗속을 걷는 기억]

- 이 글을 읽기 전,

HAISER – Now We Are Free (Gladiator) 를 재생해 보세요.

음악과 함께라면, 이 새벽의 기억이 더 깊이 마음에 스며들지도 모릅니다.


새벽녘, 어둠이 아직 남아 있는 하늘에서 조용히 비가 내린다.

마치 하늘조차 이 시간에는 마음을 놓고 울 수 있는 듯,

눈물처럼 조심스럽고 깊게 떨어진다.

그 눈물은 꼭, 오랫동안 얼어 있던 마음을 녹이는 듯이 흘러내린다.

주룩주룩, 하염없이.


어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시간.

창밖의 빗줄기는 클래식 선율과 함께 세상을 적신다.

새벽의 정적과 어울려 흐르는 그 빛나는 물소리 속에서,

문득, 나는 내리는 비를 ‘하늘의 눈물’로 느껴본다.


오늘따라 그 눈물 한 줄기가 유난히 가슴을 적신다.

세상의 이치처럼, 자연의 일부처럼,

내 감정의 한 조각이 되어 스며든다.


어릴 적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집 앞 놀이터에 나가

웅덩이를 발로 휘저으며 놀던 그 시절.

물 위로 튀는 빗방울이 장난감 같고,

비 냄새마저도 친구 같았던 때.


그리고 어느 날엔, 누나가 방 안에서 불러주던 노래가

창밖의 빗소리와 어우러져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렇게 비는 내 어린 시절의 배경 음악이었고, 기억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그때처럼 순수하게 비를 반기지는 못한다.

언제부턴가 비는 그저 젖지 않으려 피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삶이 바빠질수록, 나는 비를 ‘느끼는 사람’이 아닌

‘그저 지나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이제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나니

나는 다시, 기억 속으로 떠나는 나그네가 된 것만 같다.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잊고 있던 감정의 골목을 돌아보고 싶어진다.


비는 신이 만든 가장 슬픈 하늘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이는 비를 느끼고, 또 어떤 이는 그저 젖을 뿐이라 했다.

오늘 나는 그 말이 참 깊게 다가온다.

삼라만상 중에서 비처럼 감정을 되살리고,

마음에 조각난 기억들을 새겨 넣게 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


오늘 하루만큼은,

나는 빗속을 날고 싶은 새가 된다.

구슬프게 울며, 그러나 그 속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내 기억과 감정 위를 날아다니고 싶다.


(작가의 말)

비는 때때로 내 마음의 창을 조용히 두드리는 존재입니다.

오늘처럼 새벽녘, 그 빗소리 속에서 잊고 지낸 나를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언제부턴가 바쁘게 살아가느라 감정 하나조차 흘릴 틈이 없었는데,

비가 오면, 나는 내 마음의 잔잔한 소리를 다시 듣게 됩니다.


이 글을 읽으신 당신도,

혹시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면,

그저 잠깐이라도 그 비를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그 속엔 분명,

당신만의 오래된 기억과 따뜻한 마음이

아직도 고요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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