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비원의 존재"라는 말이 살아갈수록 마음 깊게 느껴진다. 유한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살아가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한다. 사람 동물. 식물 그리고 모든 미물들도.
내가 존재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고 먹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특별히 가장 많은 종류의 생명들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식물. 동물. 심지어 제비의 둥지도 고급 요리로 먹는다.
나 역시 고기를 먹을 때면 미안함을 느낄 때가 많다. 손질된 육고기는 형태가 보이지 않으니 그냥 넘길 수 있으나 원모양 그대로인 생선은 손질하려 도마에 올리면 눈이 나를 보는 것 같아 늘 죄책감을 느낀다. 왜 물고기는 죽을 때 꼭 눈을 부릅뜨고 죽을까?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살아갈 존재가 내 입속으로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60~70년대 대부분이 그러하듯 닭은 집마다 길렀었다. 닭은 달걀과 고기를 얻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 집도 그랬다.
닭은 직접 집에서 손질했다. 우선 칼로 목을 자르고 끓는 물을 부어 털을 제거하였다.
닭 잡는 일은 늘 어머니가 하셨다. 아버지는 무섭다고 못 하셨는데 아버지는 "너희 엄마 성이 최 씨라 독하다"고 하셨다. 나도" 엄마가 닭을 어떻게 죽이시지? 무섭지도 않으신가?"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건 모성의 힘이었다.
어머니는 평소 순하신 분이라 자식들에게 큰 소리도 한번 안 내시고 늘 품어주시는 착한 성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
나도 결혼 후 식사준비 하면서 생선 손질 하는 게 무서웠다.
예전에는 생선 손질을 안 해 주었다.
그러나 식구들 내 자식들 먹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무서운 생각도 사라지고 용감하게 칼질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면서 그립다. 자식을 길러보니 부모님 마음을 알게 된다.
다른 생명체에 의지하지 아니하면 내가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의 원리 서로 연결되어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 또한 가로 세로로 이어져 잡아주면서 살아간다. 혼자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것이다.
요즘 새벽 4시면 일어난다. 그리고 기도시간을 가진다.
물론 가족들 기도도 하지만 내 주위 모든 사람들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된다.
살아간다는 삶의 현실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 나이가 되어서 이다.
생명 자체가 비원인 것이다.
사람을 연민의 필터를 통해 보면 모두가 아픔을 품고 있다. 내가 힘들어 하는 상대 사람의 단점도 알고보면 살아내는 아우성이라고 볼수 있다.
주위 많은 지인들 각자의 삶의 아픔을 안고 삶의 강을 건너 가는 시간들이다. 더구나 육체에 쌓인 시간들은 병고의 아픔을 선물한다.
남녘에는 매화가 만발하였다고 전해왔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
우리 삶도 아름다운 슬픔의 한송이 꽃이다.
나만이라도 주위 인연들 연민의 맘으로 품어주는 시간들이 되고자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