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살이
시어머니께서 언젠가 나와 동서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씀 하셨다. ,난 너희들 시집살이 안 시켰다, 라고
그때 난 무심결에 ,안 시켰다고 할수 없으시죠,하니 시어머님이 얼굴빛이 변하셨다. 재빠르게 ,제가 집안일에 서툴고 어머님이 워낙 잘하시니 그게 힘들었어요, 하면서 말을 돌렸다.
그랬다 .시어머님은 며느리에게 많이 배려하고 잘해주시려고노력하신 거였다.
그러나 난 나름 힘들었다. 결혼후 여자는 살림해야 한다는 어머님 생각과 남편 직장과 내직장의 거리 문제등으로 3년의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부모님을 일찍 보내시고 조부모 밑에서 자라신 어머니는 당시 동갑이던 외삼촌과 국민학교 다닐적 외삼촌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학교도 중간에 못 다니시고 그만 두셨다고 했다.
계집애가 외삼촌 기를 누른다는 이유로.,
한세대 위의 사고방식 때문이셨을까, 어머님은 남존여비 사상이 몸과 마음에 뿌리 박혀 있었다.
결혼하고 시댁에서 식사할때 여자는 상위에 밥그릇도 올리지 못한다며 바닥에 밥그릇을 놓고 먹어야 했다.
귀한것은 남자 우선이었다.
제사후 약과도 어머님 아들 나의 남편 좋아한다고 따로 챙겨두셨다.
난 그때 첫애 임신중 이라 없던 식탐이 생겨 먹고 싶어했는데도 주지 않으셨다.
명절에는 남자들은 안방에서 화투놀이. 여자들은 부엌에서 명절 준비하면서 안방에 술과 안주 갖다 주기 바빴다.
심지어 애가 어릴때는 등에 포대기로 업고 하루종일 일을 해야만 했다.
손자 손녀도 차별하셔 손자들만 챙기셨다.
내딸이 6-7살때쯤 , 할머니는 여자이면서 왜 여자를 차별하냐,고 따지기도 했다.
어머님 덕분
우리집 남자들 가부장적 권위를 유지할수 있었다.
명절때 친정도 못갔다. 시댁손님 접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교육은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나의 생활은19세기에 갇혀 있었다. 친정어머님이 6남매 종가집 맏며느리. 천성이 유순하시고 착하셨다. 자라면서 보고 배운것이 내의식을 지배한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시어머니 큰 수술로 병원입원 1달 시댁은 서울 난 경남 .오가는데 10시간 걸리는 거리 였다. 일주일마다 오가며 병원 숙식하며 간병했다. 새벽5시 병원에서 시댁에 가서 사아버님 식사 챙겨드리고 병원밥 안드시는 어머님 식사도 챙겼다. 주말에 집에 내려와 남편 빨래 반찬 준비해 주고 다시 상경했다.
간병인을 쓸수 없는 경제적 이유가 아니었다. 병원비도 모두 맏이인 우리가 부담했다.
시부모 간병은 당연히 며느리 몫이라 생각하시는 어머니께 맞추어 드린것이었다.
난 왜 그리 어리석었을까?심리학을 전공한 딸이 말했다. 착한것도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라고.
시아버님 치매 마지막 1년 서울에서 모시고 내려와 집근처 요양병원에 모시고 자주 찾아뵙고 돌봐드렸다 . 돌아가신후 장례 치루어 드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에게 ,맏며느리로 한일이 뭐가 있냐,고 나에게 말씀 하셨다.
그리고 난 위암3기 위절제 수술를 했다.
그때 알았다 .날 너무 억누르고 살았구나 참 미련하고 어리석었구나. 내가 숨쉴수 있는 여유는 가졌어야 했는데...
무조건 상대에게 맞추는건 지혜로움이 아니라는걸 몰랐었다.
투병중 어머님은 내가 늘 하던 안부전화 안한다고 역정을 내셨다고 했다
생사를 오가는 며느리한테.
어머님은 낙상으로 허리를 다치시고 7년간 요양원에서 침상생활 하시다 돌아가셨다. 투병기간중이라 어머님께 자주 찾아가지도 못했다.
날 버리고 산 시간들 공허했다.
결국은 다 내 책임이었다. 내가 선택해 살아온것 잘한것도 못한것도 없다 그냥 지나간 일이다.
인생은 자신의 몫
그것은 내가 만든 나의 시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