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
얼마전 있었던 우연한 만남이 60여년 전으로 나의 기억을 데려가 주었다.
길가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중 곁에 계시던 어르신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그런데 말투가 익숙하였다.
경북 사투리 였는데 경북도 지역마다 미묘한 억양의 차이가 있다. 내가 태어난 지방의 느낌 이었다.
고향을 여쭈어 보니 이게 무슨 인연일까? 내가 태어난곳 조부모가 사시던 집 바로 윗집에서 태어나고 자라신 분이셨다. 집성촌 이었으니 인척관계 였다.
그분은 18세 결혼으로 그곳을 떠나셨으니 70년전 이었고 난 60년전 어린시절을 보내었으니 서로 만난적이 없다.
그러나 그곳의 지형과 생활 모습은 대화가 통하였다.
조부모 윗집은 서당이었다. 글읽는 소리가 들렸다. 그분은 서당 선생님의 막내 따님 이셨다.
1960년대 전기도 없었고 서당 .대장간 샘물터가 있는 경북 두원 웃마라는 산골 작은 마을이었다. 웃마는 윗마을의 줄임 말이다.
삼태기 지형 풍수상 좋은 곳이라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마을 옆 사시사철 마르지 읺는 개울이 있었고 뒷산 옆산 그리고 먼 앞산에는 문필봉이 있었다. 문필봉은 붓 모양의 산을 말한다.
문필봉 때문인지 작은 마을인데도 자손들 중 교육자가 많았다.
마을 입구에는 수백년이 넘는 정자나무가 있었고 가야 고분 같은 억덕이 있어 애들이 뛰어 놀았다.
서당 따님의 기억으로 학비는 수확기 곡물로 받았고 책 한권이 끝나면 책 걸이로 떡을 해왔다고 했다.
조부모의 집에는 디딜방아가 있었고 안채 ,사랑채 ,벼 보관 창고 ,화장실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를 모아두는 곳도 있었다. 나무를 태운 재는 농사의 요긴한 비료었다.
집 밖 외진곳에 있던 화장실 가려면 거리가 있어 밤이면 요강을 사용했다. 그지역 말로 통시(화장실) 앞에 제법 큰 바위가 있어 바위를 깍아 맷돌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 인상 깊었다. 바위 위에 서면 저 멀리 윗대 조상님들 모신 선산이 보였다.
초가집과 돌담 .마당에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키웠던 닭들이 돌아 다니다 밤이 되면 알아서 닭장에 들어갔다.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있어 가끔 병이리를 잡아가곤 했었다.
동네 바위밑 퐁퐁 솟는 샘에서 아낙들이 물동이로 물을 길어와서 집안 부엌 큰독에 부어두고 살았던 생활모습은 기억속 옛 동화의 한 장면 이었다.
당시 서울에 살던 난 방학이면 동생 3명과 기차를 두번 갈아 타면서 경북 두원까지 가서 방학 동안 생활하고 왔었다.
우리 형제 자매 4명 ,조부모, 살고 계신 작은집 5명의 사촌동생들, 숙부 숙모 북적이면 생활했던 시간들이 아스란히 기억난다.
고구마 5가마니를 사랑방에 쌓아두시고 할아버지께서 .
"저거 다 먹 고 가거라" .조금은 의기 양양 하게 말씀 하셨다.
할머님이 삶아주시기도 하셨고
소 여물죽 쑤었던 남은 불씨속 아궁이에 고구마를 던져놓고 놀고 오면 익었다. 손과 입이 까맣게 되면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경운기도 없던 시절 지게로 져 나르면서 농사일을 하셨던 고단한 노동의 댓가로 어린 우리들은 배 부르게 먹고 뛰어 놀았다. 겨울에도 사랑방에서는 가마니를 만들었고 안방에서는 왕골 돗자리 만드는 것이 있어 당시 방바닥에 깔았던 왕골 돗자리를 만들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나이들어 생각하니 내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음은 나 혼자의 노력이 아니었다.
부모님뿐 아니라 수많은 주위 인연들의
수고로움과 사랑이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것이다.
나이 들어서야 이렇게 철이 드는걸까.
지나간 옛 시간들이 가슴 저린 고마움과 함께 지나간 추억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다가온다.
우연히 만난 인연에서 60여년 전 세월을 불러오니 새삼 지금 모두 돌아가신 조부모 .부모님이 절절한 그리움으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