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위기
가끔 사람들이 무심히 말한다.. 왜 그렇게 말랐어요. 혹은 관리 잘하셨어요. 살도 안 찌고.
내가 듣기 힘들어하는 말이다. 나에게는 콤플렉스이기 때문이다. 15년 전 위암으로 위를 많이 절제하였다.
위암 3기 당시 생존율 절반이라고 했다.
평소 난 건강했다. 해산할 때 산부인과 간 것이 병원방문의 전부일 정도로 건강한 편이었다.
다만 위장기능은 약한 편이었다. 집안 유전자의 영향
친정가족들 대부분이 소식이었고 할아버지는 위암으로 돌아가셨으니 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나름 헬리코박터균 제거도 하고 내시경도 가끔 했다.
그러나 병오기 전 4년 동안 양쪽 부모님 4분 중 3분이 돌아가셨다.
맏 딸 맏며느리였던 난 일이 많았고 스트레스로 마음도 힘들었다.
주치의 삼아 다니던 병원에서 위염약을 먹던 중 내시경 을 해보겠다고 했더니. 걱정 마세요 위염입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다른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라고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곧 죽을 수 있겠구나.
원망이나 분노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평소 술과 커피는 전혀 안 먹었고 음식도 친환경으로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내 나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책을 좋아하는 난 암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렸다.
평소 불교 교리 공부 중 배웠던 죽음에 대한 고찰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품팔이가 하루의 품삯을 기다리듯 나는 내게 올 인연을 기다릴 뿐이다.
부처님 제자 사리불의 말씀이다.
저항하면 열이 나면서 나를 태운다. 받아들이면서 최선을 다하자.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당시 50대 중반이던 난 애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 날 낳아주신 부모님도 보내드렸으니 마음에 부담도 덜했다.
다만 평소 마누라 보이라 자칭하는 남편이 맘에 가시처럼 걸렸다. 혼자 남을 수 있는 남편 훈련 시켜야지.
남편에게 내가 불편하다고 말하고 다른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주위 도움으로 아주 빠른 시일에 아산병원에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은 젊은 의사에게 무릎 꿇고 수술 잘해 달라고 했다나.
나중에 들었다. 자존심 강하고 강직한 사람인데 마누라 죽는 것은 두려웠나 보다.
아무튼 난 수술을 했고 수술 후 경과도 좋았다. 마음도 편안했고 통증도 없었다.
퇴원 후 마산 집에 와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날 아는 많은 지인들이 간절한 기도를 해 주었다고 했다. 그분들의 정성이 나에게 와닿았던 것이다.
전복죽을 너무 많은 분들이 가져와 다 먹을 수 없어서 주위에 나누어 주었다. 과분한 사랑과 배려를 받았다.
건강하게 살아 갚아야 할 은혜라 생각했다
1년 동안 항암 내복약을 복용했다. 4주 먹고 2주 쉬고 서울 병원 가서 추적검사. 이과정이 힘들었다. 항암 후유증과 재발의 두려움을 안고 생활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신의 일정을 조정하여 먼 거리를 빠짐없이 동행해 주었다. 수시로 산에 데려가 맑은 공기도 마시게 했다.
지극정성이었다. 그동안 서운했던 마음이 다 사라지고 병이 나으면 잘해 주어야지 다짐했다.
요즘 삼식이인 남편 열심히 수발하고 있다.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려서는 안 되니까?
물론 투병 중 사람에게 상처도 받았다. 평소 친하다고 여긴 지인은 내가 암 걸렸다고 전화했더니 날 손절했다. 믿었던 사람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전염병 환자 취급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2년 후 그이 남편이 위암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샘통이네 너도 당해봐라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난 수양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수술 후 15년을 살았다. 죽을 목숨 현대의학으로 연장해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힘든 시간들도 있었지만 배운 것도 많다.
난 연약한 존재인 것이다.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생. 노. 병. 사 중 병고에서 인생의 깊이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