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소설 <재와 윤>
당신도 누군가를 구원한 적이 있나요?
윤이 떠나고 나서 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재는 사실 윤을 따라갈 마음이 없었다.
윤에게 구원은 배움이었고, 재에게는 돈이었으니까
실오라기 같은 가운을 걸친 여자들이 우르르 지나간다.
텐프로라는 술집
하룻밤 술자리에 몇백만 원이 사라지는 곳.
돈의 가치보다 욕망이 더 우위에 있는 곳.
재는 윤에게 즐거운 생일파티를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일하는 가게로 초대해 그럴듯한 룸을 잡아주고 샴페인을 터트렸다.
윤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곳에 가봤다.
친구들과 함께였지만 낯설고 심지어 두렵기도 했다. 화장실조차 혼자 가기가 버겁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 여자들끼리 놀러 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고 아까 그 실오라기 같은 가운을 걸친 여자들이 윤과 그 친구들을 구경하기 위해
룸으로 왔다.
윤은 불편했고 재는 얼른 그 여자들을 치웠다.
치웠다는 말이 맞겠다 싶은 순간이었다.
언젠가 윤은 재에게 물었다.
“네 가게에서 그렇게 예쁜 여자들이 발가벗고 돌아다니는데 만나고 싶거나 끌리거나 그런 적은 없어?”
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없어, 그냥 나 돈 벌게 해주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들에게 감정을 가지면 이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나는 지금 돈을 벌어야만 하고..”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해줘, 걔네도 돈이 필요해서 하는 거니까 얼른 벌어서 나가라고.”
그게 그들에게 필요한 말일까 윤은 그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여자들이 웃음과 몸을 팔고 필요한 것을 채운다. 그 필요는 자신의 필요이기도 했고, 가족을 위한 필요이기도 하다고 들었다. 아주 슬픈 필요라고 생각했다. 함부로 그들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었고, 술집 상무로 일하는 재의 선택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재는 윤을 사랑했다. 그래서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때로는 줄 수 없는 것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재는 가난했다. 일찍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의 생활비와 큰 씀씀이를 감당하느라 대학을 다니면서도 밤에 나이트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그 일을 성실하게 잘하면서 큰 술집에 스카우트 돼서 상무로 일하게 된 것이었다. 재는 이제 가난하지 않게 됐다. 재가 데리고 있는 여자도 많고, 손님도 많아 재가 한 달에 버는 돈은 대기업 신입사원의 연봉 정도였다.
윤은 이런 세상이 있는지도 몰랐다.
윤도 가난했지만, 시궁창 같은 삶에서 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책과 그림과 음악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반지하, 쾌쾌한 냄새가 진동하는 곳, 불을 끄면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소리 들리는, 비가 오면 벽지에 비가 다 스며들고, 비가 멈추면 곰팡이가 가득 피는 곳.
윤이 하루를 마치고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은 그런 곳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만난 재는 윤과 비슷했지만 달랐다.
윤과 재는 가난을 이겨내는 방법이 달랐고,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이 달랐다.
윤은 대학을 다니며 꿈을 키웠고, 밤새 책을 읽거나, 미친 듯이 미술관을 다니며 그림을 봤다.
그녀의 MP3에는 천 곡이 넘는 음악이 들어있었으며 한순간도 이 세 가지 중의 하나를 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가난에 찌든 윤은 이 세 가지를 하고 있는 시간만큼은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었고, 시궁창에서 구원받는 듯한 느낌을 느꼈기 때문이다.
재는 그런 윤이 좋았다.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윤에게 사랑을 느끼게 됐다.
그리고 윤의 구원자 역할에 동참하고 싶었다.
재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기로 했다.
“내가 돈 줄게. 하고 싶은 공부 하러 가”
“무슨 소리야?”
“너 전에 유학하고 싶다고 했잖아”
“근데 왜 네가?”
“그냥 너 먼저 가 있으면 내가 여기 정리하고 곧 따라갈게”
“진짜 온다고?”
“응 나도 이 일 정리하고 갈게”
윤은 고민하지 않았다. 듣자마자 구원 열차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지긋지긋한 반지하에서 벗어날 기회를 자존심 따위를 내세우며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내세울 자존심조차도 없었는지 모른다. 이기적인 선택이고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윤에게는 구원이 필요했다. 윤이 그 술집 여자들을
비난할 수 없었던 마음이 윤을 보는 누군가에게도 있길 바랄 뿐이었다.
재는 윤을 보면서 대리만족했다. 다른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내려 하는 윤이 좋았다.
하지만 재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은 반지하에 넣어두고
꺼낼 수 없었다.
윤은 빠르게 유학 준비를 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재가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
“그래야지, 네가 준 기회니까 더 열심히 할게. 공부하면서 바로 아르바이트도 알아보고...”
“통장에 넉넉히 보내뒀어.”
“아.. 응 고마워”
“당분간은 공부에 집중해, 그리고 우리 삶도 좀 위를 향해보자 ”
재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돈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재는 윤에게 돈을 보내고. 어머니에게 차를 한 대 사주고 어머니의 빚을 다 갚은 뒤
일을 그만뒀다.
영문과 4학년으로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일하던 재였는데, 등록금과 쓸 돈을 어느 정도 남겨 둔 뒤 다 정리한 것이다.
“학교 마무리하고 갈게”
“... 그럴 수 있을까?”
결국 재는 오지 않았다. 학교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다른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언젠가 윤이 재에게 말했었다.
“돈을 조금 벌더라도 나중에는 다른 일을 했으면 좋겠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널 위해서 그게 낫지 않을까? 이제 빚도 다 갚았잖아”
재는 윤을 사랑했다. 하지만 윤에게 갈 수 없었다. 윤은 끝까지 재가 왜 오지 않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윤은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시궁창 같았던 삶에서 구원해 준 것이 재가 준 돈이 아니라
재, 그 자체였음을
윤은 슬펐다.
그리고 윤은 재에게 편지를 남기고 좀 더 멀리 떠났다.
이제는 재가 와도 윤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