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몬스터> 「컷」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그로테스크’와 ‘우스꽝스럽다’는 단어를 합친 ‘그로테스크꽝’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쓰리, 몬스터>의 단편 「컷」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헤어질 결심>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를 분석해 보려 한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쓰리, 몬스터>의 단편 「컷」은 흡혈귀가 흡혈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화면이 전환되면서 이곳이 영화 세트장이었고, 방금까지 흡혈을 하던 인물은 영화배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 영화를 촬영하던 류지호(이병헌) 감독은 집(이 집은 영화 세트장과 동일하므로, 관객으로 하여금 방금까지 본 공간이 세트장이 아니라 집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으로 돌아와 괴한(임원희)을 마주치게 된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류 감독은 벽으로 연결된 줄에 묶여 있고, 아내(강혜정)는 몸이 묶인 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으며, 쇼파에는 납치된 아이가 앉아 있다.
괴한은 자신을 류 감독의 영화에 자주 출연한 엑스트라로 소개한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괴한은 자신이 엑스트라로 했던 연기를 보여 주면서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한다. 이는 ‘괴한의 침입’과 ‘줄에 묶인 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끔찍한 내용과 희극적인 표현 양식이 충돌하는 그로테스크의 특징 중 하나다.
괴한은 류 감독을 능력 있고 부유하고 잘생겼는데 ‘착하기까지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는 보통 영화 속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착하고 부자가 나쁜 경우가 많은데 류 감독 같은 사람이 착하기까지 한 것은 불공평하다면서,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고백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류 감독은 자신의 잘못이 떠오르지 않아 “착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고백을 망설이는 류 감독에게 괴한은 5분마다 아내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고, 실제로 이를 수행한다. 뿐만 아니라 자른 손가락을 믹서기로 갈면서, 병원에 가면 손가락을 붙일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마저 꺾어 버린다. 손가락을 절단하고도 완전히 훼손해 버리는 이 설정은 신체 이미지를 훼손하는 그로테스크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제 괴한은 류 감독에게 아내를 살리고 싶다면 아이를 죽일 것을 명령한다. 류 감독은 아내에게 “아이를 죽일까?”라고 묻는다. 초반부에 아내는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후 괴한이 아내의 입을 막았던 천을 풀어 말할 기회를 주자 아이를 죽이라고 소리 지른다. 우리 사회는 유아 살해를 몹시 파렴치하고 반사회적인 범죄 행위로 여긴다. 또한 보통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른에게 아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고, 실제로 어른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아이를 지켜야 할(혹은 죽이지 않을) 책임을 저버릴 수 있다’라는 정서는 몹시 불쾌하다.
류 감독이 처한 상황, 즉 ‘아내’와 ‘일면식 없는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 상황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묻는 것 같다. 아이를 죽이라고 소리 지르는 아내이자 어른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그로테스크함을 느낀다. 이처럼 「컷」은 우리가 기피하는 정서에 주목한다.
후반부로 가면 관객이 집으로 믿고 있었던 공간이 사실 세트장이었다는 것이 다시 한번 밝혀진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공간은 결국 세트장이었다가 집이었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세트장으로 변하면서 관객에게 혼란을 준다. 또한 세트의 장치를 만지는 손가락이 영화 속에 스쳐 지나가는데, 그 손가락은 영화 속 어떤 인물의 손가락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볼 수 없는 거대한 힘이나 구조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구조-세트장 속에서 ‘착한 사람’이었던 류 감독은 일면식 없는 아이의 목을 조를 정도로 ‘나쁜 사람’이 된다. 결국 원래부터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트장으로 비유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착한 사람이 되기도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개인이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주제 의식을 그로테스크한 표현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2006년 개봉한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믿는 한 여성 영군(임수정)의 이야기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영군은 여공들이 모인 공간에서 교육 방송을 듣는다. 교육 방송은 무언가를 조립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내 그 목소리는 영군에게 “양 손목을 칼로 그은 후 피복을 벗겨낸 전선을 한쪽씩 넣”으라고 지시한다. 영군은 목소리를 따라 아주 자연스럽게 칼로 손목을 긋고 전선을 꽂는다.
영군은 이런 행위가 자신의 배터리가 다 떨어져 가기 때문에 “충전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하지만 영군을 제외한 영화 속 인물들과 관객은 이것이 자살 기도라는 것을 안다. 박찬욱 감독은 섬뜩한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하면서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하고 있다.
영군은 ‘신세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곳에서 ‘안티 소셜(반사회적 인격 장애)’인 일순(정지훈)을 만난다. 일순은 타인의 것은 무엇이든 훔치며, 그것은 꼭 물건이 아니라 감정이나 특성일 수도 있다. 즉 자아는 없고 타인의 것을 훔쳐서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일순의 이러한 특성은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점으로 자신이 소멸할 것이라는 불안에 기반한다. 실제로 영화는 일순이 불안함을 느낄 때 의도적으로 일순의 크기가 줄어드는 CG 효과를 넣는다. 몸이 작아지는 것은 기이하고 기괴한 일이지만, 박찬욱 감독의 세계관 속에서는 이러한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영군은 밥을 먹지 않고 배터리를 손가락에 가져다 대거나 혀에 가져다 대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충전’을 한다. 자신을 싸이보그로 정체화한 결과 밥을 먹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영군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믿을까? 영군은 외할머니를 잃는 경험을 했다.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를 오랫동안 돌봤고, 분명 그 오랜 돌봄에 지쳤을 가족들이 외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냈기 때문이다. 영군은 자신의 슬픔이 가족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정체화하고, 그 어떤 죄책감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싸이보그’로 믿는다.
그러나 영군은 싸이보그가 아니기에 죄책감을 느낀다. 영군을 구성하는 가장 큰 죄책감은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이다. 영화 속에서 영군은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면서 놓고 간 틀니를 자신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할머니에게 전해 줘야 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영군이 밥을 먹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다. 할머니는 틀니가 없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데 자신이 밥을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군은 할머니를 데려간 의사들을 ‘하얀 맨’이라고 부르며, 상상 속에서 이 하얀 맨들에게 복수를 한다. 영군의 손가락이 돌아가고, 손가락에서 나오는 총알을 의사들에게 퍼붓는 장면은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 장면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표현하는 그로테스크함의 절정과도 같다.
영화는 영군과 일순, 신세계 정신병원을 중심으로 낯설고 생경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낯설고 생경한 세계는 다양한 환자와 그들의 서사를 보여 줌으로써 그로테스크를 부각한다. 그러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속에서는 우리가 낯설고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우리가 정상이라고 규정할 법한 의사나 다른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인물로만 머무른다. 그들은 영군과 분리된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자 영군의 상상 속에서 영군에게 총을 맞는 대상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유독 밝은 색채와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식과 내용이 표현 양식과 대비되면서 그로테스크함이 더 부각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2022년 개봉한 영화 <헤어질 결심>은 한 남성이 산에서 추락사한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장해준(박해일)과 사망한 남성의 아내 송서래(탕웨이)의 이야기다. 서래는 중국인이고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했으며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인물이다. 남편이 사망했을 때 우리는 아내를 가장 먼저 의심한다. 그런데 그 아내가 외국인이고 젊고 예쁘다면 의심은 더 불어난다. 해준의 부하 경찰은 이러한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 인물과도 같다. 그러나 해준은 “예쁘고 외국인이어서” 용의자로 의심받을 수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해준은 중국인인 서래와 더 잘 소통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고,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라는 서래의 말에 웃는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을 감시하던 순간을 두고 “믿음직한 남자가 잠도 안 자고 날 지켜 주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형사와 용의자의 관계가 희미해지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만 남을 때 이 영화의 로맨스는 시작된다. 그러나 결국 서래가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해준은 서래에게 이별을 고한다. 거짓으로 시작된 사랑이 끝났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서래는 해준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서래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해준과 대화할 때 통역 앱을 사용한다. 따라서 해준과 관객은 서래의 말이 번역되길 기다리게 되고, 이 과정에서 대화의 지연이 발생한다. 발화 사이에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은 이 영화가 세운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래와 해준 사이에는 발화의 시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시차도 존재한다. 사랑은 동시에 발생하는 ‘나’와 ‘너’의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래와 해준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서래의 대사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죠”는 그런 의미다. 서래가 이 대사를 중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이는 해준은 이해하지 못하고 관객만 이해할 수 있는 기이한 대화다.
서래는 산에 올라 “이대로 죽어도 좋다”라고 말하는, 등산이 취미인 전남편을 산꼭대기에서 밀어 살해한다. 아픈 서래의 엄마는 서래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서래는 펜타닐을 이용해 엄마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서래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을 산에서 죽게 해 주는 인물이며, 죽여 달라는 인물을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죽여 주는 인물이다. ‘배려심 있는 살인자’라는 부조화는 서래의 특성에 얼마나 이질적인 정서가 공존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서래는 이질적인 마음을 가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서래는 해준이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서래가 바다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해준이 품위를 잃고 붕괴됐다는 사실의 증거와도 같은 자신을 “깊은 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함으로써 해준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래의 죽음은 해준이 “벽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자신의 생각만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서래의 마지막 결심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가 자신을 절대 잊을 수 없도록) 형벌을 주는 것과도 같다. 서래의 죽음은 곧 해준을 향한 사랑과 같은 의미라는 점에서, <헤어질 결심>이 그리는 사랑의 모습은 독특하고, 기이하며, 혼란스럽고, 그로테스크하다.
해준은 최연소로 경감 자리에 오를 만큼 유능한 경찰이면서 다정하고 자상한 남편이기도 하다.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불면증을 겪는다. 그리고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치기까지 했다. 늘 똑바로 보고 싶어 눈에 인공눈물을 넣는 형사인 해준은 서래와 관련된 일은 단 한순간도 똑바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해준은 서래가 첫 번째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고, 두 번째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믿지 못했고, 서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해준 또한 부조화를 경험하는 이질적인 인물이다.
<헤어질 결심>은 멜로를 전면에 내세운 미스터리 영화다. 멜로에 충실한 서사를 보여 주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박찬욱 감독이 그려온 그로테스크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서래와 해준 모두 이질적인 특성이 공존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로테스크의 특성 중 하나인 ‘부조화’를 읽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