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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리스 스탈링의 성장담

<양들의 침묵> <한니발>

by 일영

1992년 아카데미는 말 그대로 <양들의 침묵(1991)>의 장이었다. 호러 영화라는 제약에도 <양들의 침묵>은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각색상 총 5개의 상을 수상하며 랜드슬램을 달성하였다. 약 20분의 등장만으로 영화 전체를 지배한 안소니 홉킨스와 굴곡을 겪으며 성장하는 조디 포스터의 모습은 이 영화가 변치 않는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Entertainment Weekly, JOHN BARR/LIAISON

토머스 해리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한니발’ 시리즈는 <양들의 침묵>, <레드 드래곤(2002)>, <한니발(2001)>, <한니발 라이징(2007)> 4부작으로 이어진다. 소설상의 전개를 따진다면 <양들의 침묵>은 <레드 드래곤>의 후속작이지만, <레드 드래곤>보다 먼저 제작되었다. 사실 한니발 렉터와 관련된 창작물은 많다. 한니발 렉터의 존재감도 부족하고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마이클 만의 <맨헌터(1986)>, 그 유명한 드라마 <한니발> 시리즈, 한니발의 존재를 지우고 클라리스의 서사를 담은 드라마 <클라리스>까지. 하지만 지금의 영상화된 한니발의 이미지를 공고히 한 것은 안소니 홉킨스가 한니발로 등장하는 영화 ‘한니발’ 시리즈일 것이다.


©네이버 영화

<레드 드래곤> 한니발이 수감된 상황적 제약에도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파악하고 지배하며, 개인적 보복까지 실현하는 설계자의 면모를 보여 줬다면,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은 더욱 강력하다. 한니발은 FBI 생도 클라리스 스탈링과 만나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사건을 바라보고 클라리스에게 사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클라리스가 가진 개인적 경험을 파고든다. 클라리스와 한니발의 대화는 어떨 때는 상담자와 내담자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클라리스가 가진 트라우마를 알아차리고 이를 직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양들의 침묵>은 호러물이면서 클라리스의 성장과 치유의 과정을 그린 성장물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클라리스는 체구 있는 여성을 살해하고 그 가죽을 벗기는 ‘버팔로 빌’이라는 연쇄살인범을 잡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수감소에 수용된 한니발 렉터를 만나게 된다. 한니발은 명망 있는 정신과 의사였지만 자신의 환자를 살해하고 그 인육을 요리해 먹은, 일명 ‘Hannibal the Cannibal’이라고 불리는 살인마다. 사람을 조종하거나 사람의 마음을 간파해 내는 능력을 가졌으며, 사람을 살해할 때도 심장 박동이 85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 인물이다.


한니발의 악명을 접한 클라리스와 관객들은 수감소에서 한니발을 대면하고 그의 분위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한니발은 클라리스를 만나자마자 그를 평가하고 가르치려고 들며, 모욕하기까지 하는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지만, 클라리스는 한니발을 예의 있게 대한다. 한니발에게 조롱만 받고 아무 소득 없이 돌아서던 클라리스가 옆 수감자에게 모욕을 당하자 한니발은 자신은 무례한 걸 몹시 싫어한다며 클라리스에게 힌트를 준다.


©영화 <양들의 침묵>

한니발은 클라리스에게 사건에 대한 열쇠로 “너 자신(yourself)을 잘 들여다보라”라고 말한다. 한니발의 수수께끼를 푼 클라리스는 유어셀프 물품 보관소를 찾아낸다. 하지만 물품 보관소는 철문으로 닫혀 있다. 겨우겨우 철문에 틈을 만든 클라리스는 물품 보관소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 과정에서 다리에 상처를 입게 된다. 깜깜한 물품 보관소 안에서 클라리스는 사람의 머리를 발견한다.


다시 한니발을 찾아온 클라리스에게, 한니발은 물품 보관소에서 머리를 본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본다. 클라리스는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흥분되었다고 말한다. 물품 보관소는 클라리스의 내면 같은 공간이다. 클라리스가 그동안 직면하지 않았던 어둡고 깜깜한 내면.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는 상처를 입히는 무서운 일이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했던 것을 마주하게 만드는, 몹시 흥분되는 일이기도 한다.


©영화 <양들의 침묵>

클라리스의 내면과 트라우마가 클라리스 내부의 문제라면, <양들의 침묵>은 클라리스가 직장에서 감내해야 하는 불편한 시선, 즉 클라리스 외부의 문제도 꼬집는다. 클라리스는 FBI에서 몇 안 되는 여자 FBI 생도다. 영화는 클라리스가 젊은 여성 FBI로서 겪게 되는 시선을 직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엘리베이터에서 키 크고 건장한 남성들 사이 체구가 작은 클라리스가 올라타자 클라리스를 훑어보는 남성들의 장면이나, 칠튼 박사의 희롱에 자신은 챠밍 스쿨 학생이 아니라고 응수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크로포드가 클라리스 앞에서 “성범죄와 관련된 이야기는 여자가 없는 곳에서 하자”라고 말하는 순간, 클라리스를 FBI가 아닌 여성이라는 성별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선처럼 은밀한 폭력도 표현한다.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것은 클라리스인데, 클라리스의 공은 아예 배제해 버리는 상황이다. 사실 이 부분에서 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가 나타난다. 크로포드가 클라리스를 배제했던 게 경찰들을 안심시키려는 연막이었다고 말하자, 소설 속 클라리스는 “경찰들은 부장님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을 보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하죠(공보경 옮김, p.138)”라며 아주 부드럽게 자신의 의견을 표한다. 그러나 영화 속 클라리스는 이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임을 콕 집어 강조한다.


©영화 <양들의 침묵>

한니발은 이러한 상황을 보다 직접적으로 꼬집는다. 클라리스에게 잭 크로포드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니냐고 묻거나, 크로포드가 클라리스와 섹스하는 모습을 상상할 것이라고 말하거나, 목장 주인이 구강성교를 강요했냐고 묻는 등 클라리스를 희롱하는 듯한 발언을 하지만, 이건 클라리스에 대한 외부의 시선을 한니발의 말로 옮겨 표현하는 것에 가깝다. 남초 직장의 몇 안 되는 어린 여자가 나이 있는 직장 상사와 그렇고 그런 사이일 것이라는 상상, 트라우마를 겪는 젊은 여자에게는 성적으로 학대당한 과거가 존재할 것이라는 편견들 말이다. 한니발은 이러한 편견을 그대로 읊고, 클라리스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다고 부정하거나 별다른 말 없이,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짓는다. 한니발의 말과 클라리스의 반응은 클라리스가 ‘불편한 환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부각한다. 동시에 이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시선을 반성할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 막바지, 사건을 해결하고 정식 FBI가 된 클라리스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온다. 소설에서는 한니발이 클라리스에게 쓴 편지에 있던 “클라리스, 양들은 울음을 그쳤는가?(이윤기 옮김, p.554)”라는 질문이, 영화에서는 전화로 전달된다. 아직 전달되지 않은 채 렉터의 손에 있었던 물음이 일대일의 상호 대화 속에서 클라리스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러나 클라리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끊어진 전화를 붙잡고 렉터의 이름을 외치는 클라리스, 그리고 칠튼 박사를 쫓아가는 렉터의 뒷모습을 멀리 조망해 주며 끝났던 <양들의 침묵>은 리들리 스콧의 <한니발>로 이어진다. 조디 포스터가 줄리안 무어로 교체되면서 팬들은 아쉬워했지만 줄리안 무어도 지칠 대로 지친 클라리스의 분위기와 나름 어울린다.

전편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눈이 가득했던, ‘교도관의 공간’을 자신의 마음대로 꾸며 놓고 탈옥한 한니발은 이제 바깥을 활보하며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클라리스는 괴롭다. 경찰 집단 내부의 시선에 질릴 대로 질린 클라리스는 차라리 한니발이 자신에게 나타나 주길 바란다. 클라리스 내면의 갈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한니발은 계속해서 클라리스의 주위를 맴돈다.


©IMDB

<양들의 침묵>에서 쇠창살 사이로 파일을 건네주며 클라리스와 손끝을 스쳤던 짧은 접촉에 비하면 <한니발>에서의 접촉은 너무나도 노골적이다. 그동안 클라리스를 교묘하게 괴롭혔던 상사의 머리 뚜껑을 열고 뇌를 조각내 굽는 등 적극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고, 클라리스의 귀에 대고지구의 반을 돌아서 자네를 만나러 왔네”라고 속삭인다. 다른 영화였다면 로맨틱한 대사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한니발>에서는 그렇지 않다. 스탈링이 거부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That's my girl...”이라고 말하는, 한층 느끼해진 한니발에게 클라리스는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다. 클라리스는 한니발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FBI 앞에서 “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 소속이다”라고 외친다. 그동안 직장에서의 상황이나 한니발로 인해 내면의 혼란을 겪던 클라리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며 FBI 수사관으로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 속 클라리스는 아버지 콤플렉스, 일명 대디 이슈(Daddy Issue)를 가진 인물이다. 클라리스는 보안관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FBI를 꿈꾸게 되었으나 내적으로는 트라우마와, 외적으로는 FBI라는 남초 사회에서의 불편한 시선과 싸워야 한다. 불편한 상황에 놓인 클라리스에게는 두 명의 유사 아버지들이 있다. 클라리스에게 사건을 맡기고 클라리스를 보호하는 상사 크로포드와 클라리스에게 끊임없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며 그를 돕는 한니발. 크로포드와 한니발은 클라리스와 묘한 관계를 형성하는 아버지들이다. 법과 질서의 편에서 클라리스를 보호해 주는 아버지와 통제 불가능한 욕망의 편에서 클라리스를 좌지우지하는 무서운 아버지, 이 두 유사 아버지들 사이에서 클라리스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쓴다.

©영화 <양들의 침묵>

영화 속에서 아버지 콤플렉스를 가진 주인공이 홀로 서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물론, 실제로 죽이는 경우도 있다). 클라리스는 한니발을 끊어냄으로써 한니발의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물론 한니발로 인해 클라리스는 한층 성장했다. 한니발이 남긴 것들은 클라리스의 삶에 계속 남을 것이다. 하지만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딛고 성장한 양은 이제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소설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이 클라리스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는 같은 별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군, 클라리스(이윤기 옮김, p.555)”다. 한니발은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강박과 어둠을 가진 클라리스를 봤다. 소설 <한니발>에서 한니발은 긴장과 스트레스, 불안으로 가득 찬 클라리스를 유혹한다. 한니발이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클라리스의 정의감을 계속 흔들자 소설 속 클라리스는 세뇌당해 한니발에 동화되고 만다. 법과 질서를 준수해야 할 선의 타락이다. 영화 <한니발>은 토머스 해리스가 자신의 책 <한니발>에서 파괴하고 타락시켰던 클라리스 스탈링의 의지를 복구한다. <양들의 침묵>이 스탈링이 내면을 인지하게 되는 이야기였다면, <한니발>은 스탈링이 내면을 단단히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양들의 침묵>이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개봉 이후 첫 재개봉이다. 모 영화관의 홍보에 따르면 <양들의 침묵> 재개봉은 ‘보석 발굴’ 프로젝트의 상영작 중 하나다. 보석 발굴이라는 타이틀을 달기에 <양들의 침묵>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려지다 못해 클래식이 되어 버린 보석이지만, 그런 건 차치하고서라도 영화관에서 그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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