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사원의 반성문

설거지하던 시간들

by 최용석

신입사원의 반성문


“Hey Google, 술 마시고 싶어질 때, 술 마시고 싶은 욕구 없애주는 음악이랑 보면 도움이 될 이미지 찾아줘. 흉측한 경고성 사진 말고.”


건설 쪽은 술자리가 많은 편이다. 수주해서 한 잔, 진급해서 한 잔, 이래서 한 잔, 저래서 한 잔 마시다 보면, 의도와 달리 즐겁지 않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과음으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게 되거나,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안 해도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얘기까지 하게 된다. 자제가 잘 안 되는 경우도 많이 생긴다. 그다음 날은 얼굴을 잘 들지 못할 정도로 곤혹감을 느끼다가도, 퇴근 시간이 되면 오늘은 누구랑 한잔할까 두리번거린다. 아주 술이 술을 부른다. 어제 실수한 죄책감도 주인이랑 같이 퇴근한다.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옆 팀 회식 자리에 참석했었다. 나이 드신 부장들이 두 분이나 계셨지만, 내가 속한 팀이랑은 조금 다른, 좀 부드러운 분위기의 팀이었다. 그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서 나대고 까불었다. 하지 말아야 할 얘기들까지 떠들어댔고, 그분들 중 한 분이 17년 동문 선배인 줄도 모르고 실수까지 했다. 다음 날 긴장해서 일찍 출근했는데, 문득문득 파편의 형태로 기억나는 어제의 일들이 온 머릿속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 이를 어쩐다….


붓펜을 꺼내 그 선배님께 편지를 쓰듯 반성문을 썼고, 그분께서 출근하시기 전에 자리에 몰래 가져다 놓았다. 얼마 지나 나를 부르시는 선배님. 이건 학창 시절 뭘 잘못해서 선생님에게 두들겨 맞기 전보다 공포가 더 했는데, 그냥 “글씨 잘 쓰네.” 하셨다. 물론 무슨 당부의 말씀도 하셨는데, 긴장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신입 사원의 반성문을 보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가깝게 지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어려움이 생겨도 늘 챙겨주시고 응원해 주신 참 고마운 분이다. 화가 나셨을 텐데 차분한 목소리로 내 글씨 칭찬을 하시다니, 놀라운 분이다. 암튼 나는 글씨를 잘 쓴다. 글씨는 그 사람 마음의 얼굴이라는데 맞지?


참 별게 다 자랑이다.


처음 대학교 입학했을 때는 술을 거의 마시지 못했다. 맥주 500cc 한 조끼도 다 못 마셨을 정도였는데, 군 입대 앞두고 친구들과 매일 마시면서 술이 늘었다. 어쩌면 그때 배운 술버릇이 평생 계속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술은 어른 앞에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매일 저녁 5시 반이 되면 가설건축물 2층에 있는 동춘옥에서 두부 김치랑 마셔대던 소주. 첫날은 두 잔밖에 못 마시던 놈이, 한 달이 지나니 주량이 두 병으로 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에 대해 다른 나라보다 관대하다고 한다. 뭐 그럴 수 있다는 너그러움이 있어서일까? 자신들도 그다음 날 후회한 일들, 혼났던 일들이 있어서 넘어가 주는 건가? 그래서인지 사회 초년생 때부터 술 때문에 심하게 혼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미 공병단에서 미국인 PM이 “매일 그리 술을 마시고 다니면, 내가 당신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냐?”는 질타에 깊이 반성하기도 했지만, 술버릇이 많이 고쳐지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이 들면서 계속 긴장하면서 마시려 했고,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술버릇은 많이 좋아졌다. 그냥 다들 타인의 술버릇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으리라.


요즘은 직원들이랑 술 마시자고 하면 직장 내 괴롭힘이란다. 다들 그 시간에 자기 계발하고, 자기 관리 시간 및 미래를 위한 투자 시간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간혹 술을 마셔도 죽이 잘 맞는 이들하고만 마신다고 하지?

그 흔하던 향우회, 동문회, 동기 모임도 거의 다 없어졌다. 흥청망청 2차 가자고 외치던, 골목 전신주에 기대어 구토하던 시대는 이젠 사라지고 없는 거다.

윗사람들만 꼰대처럼 이야기하는 술자리가 싫기도 할 거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좀 심하다. 선배가 되면 후배보다 더 똑똑해야만 하고, 자신들에게 정답이 있다고 믿고, 그걸 꼭 얘기해줘야 할 것 같은 거지 같은 의무감이 있는 것 같다. 헌법에 아니, 육법전서 어느 조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쓰여 있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나도 어느 자리에 가면 똑같이 떠들고 있다. 욕할 자격이 없다. 요즘같이 빠르게 변하고, 인생의 답이 더 없어진 세상에서 무슨 도움이 된다고 떠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젊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어주며, 입은 닫고, 지갑만 여는 게 잘하는 거란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 사람들은 겨울철 블랙아이스로 여기고 조심한다고 한다. 예전 기피 대상에서 요즘은 공포의 대상으로까지 평가절하된 거겠지? 술 마시기 좋아하고, 말 많은 나로선 더 반성해야 한다.


반성문을 읽고 너그러이 나를 품어주신 분이 그런 분이셨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려는 분, 자신의 역할에서 최상의 결과를 도출해 내셨던 분이었다. 70세 넘도록 계속 본인의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품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끔 전화 통화할 때마다 아직 실무를 하고 계신다는데, 그걸 들은 난 늘 말씀드렸다.

“청년 실업이 심각한 이유가 있네요, 선배님께서 아직 일하고 계시니까 일자리가 부족한 거예요.”

그냥 웃으신다.


문득 궁금해서, AI에 물어보았다. 술 먹고 싶을 때 참게 해주는 음악과 들여다보면 도움이 될 이미지를 추천해 달라고.

“<Erik Satie - Gymnopédie No.1>, <Ludovico Einaudi - Nuvole Bianche>, <Brian Eno - Ascent (An Ending)>, 빗소리나 파도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가 도움이 됩니다. 푸른색과 녹색 계열의 자연을 묘사한 그림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자제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어서, 탁 트인 자연이나 고요한 풍경을 보며 깊게 심호흡을 해보세요.”라고 한다.


비 오는 날 탁 트인 바닷가 테라스에서 빗소리, 파도 소리와 AI가 알려준 음악을 듣는 상상을 하니 2가지가 빠졌다. 같이 앉아있을 가까운 사람과 소주. 아직 정신 못 차렸다.


이 글을 빌어 그간 저의 술자리 결례로 상처받았던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조만간 소주 한잔 사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입니다.


오늘 오십 대 중반이 돼서 다시 한번 반성문을 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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