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견하다, 대견해. 쓸데없이

끈적하게 남아있는 기억들

by 최용석

대견하다, 대견해. 쓸데없이


“회장님, 제가 설계사 사장으로 취업했습니다. 설계는 잘하는 회사입니다. 일 좀 맡겨주시면, 그래도 친정인데 도움이 되도록 잘해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룹 공사만 하던 건설사에서 임원 포스트 하나 더 만들겠다고 신규팀을 만들어 내게 팀장을 명했다. 담당 임원의 속내를 간파한 관리본부에서는 신규 팀에 지원을 해주려 하지 않았다. 인원도, 일할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왜 가는 회사마다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참 팔자가 더럽다.


사실 이 회사는 공공 발주 사업을 수주할 DNA가 없는 회사라 처음부터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담당 임원의 의지와 역량을 믿어보기로 했다. 역시나 믿을 놈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 직장이고 싶었는데, 7년 반 만에 회사를 옮겼다.


예전 대형사업을 같이 하던 사회 선배가 모 회사의 전무로 가면서 같이 하자고 불렀다. 나는 두 달 후에 상무로 합류하여 신규 사업 수주를 담당하겠다고 했는데, 인성이 거지 같은 임원 놈 때문에 그가 담당하던 관리 사업을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되었다. 그 사업은 진전이 없었고, 타개책도 별로 없었다. 입사 6개월이 되었을 때 나를 추천한 전무가 해고되고, 나도 그 라인이라는 이유로 몇 달 뒤 잘렸다. 회사 생활하면서 처음 잘려 봤다. 그다음 날 ‘책상 뺀다’라는 말이 그냥 지어낸 비유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밤사이 사무실 레이아웃을 바꾸다니 참 대단하다.


사십 대 후반에 임원을 달고 실직자가 되니 취업길이 꽉 막혔다. 차라리 부장으로 잘렸으면 다른 회사 직원으로 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상무라는, 임원이라는 꼬리표가 이렇게 옥죄는 일일 줄이야. 마치 ‘주홍 글씨’라도 되는 것인가? 사실 이력서를 작성할 때 임원 빼고 작성하면 되는데, 내가 워낙 고지식해서 그런 걸 잘 못한다.


참 별게 다 자랑이다.


1년간 백 군데 이상 이력서 제출하고 서른 번 가까이 면접을 봤지만, 다 떨어졌다. 그러던 중 알고 지내던 설계사에서 사장 업무를 제안해서 드디어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잘린 회사의 재무 담당 임원의 자녀 결혼식 소식을 들었다. ‘○○설계사사무소 사장 최용석’으로 화환을 보내고, 잘 보이는 곳에 놓아달라고 부탁도 했다. 명함 한 줌을 양복 주머니에 찔러 넣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저 멀리 회장이 손자를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임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표정이 살짝 굳은 그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정중히 인사하고는 주머니 속의 새 명함을 내밀었다.

"설계사무소에 취업했으니 설계 일을 좀 주시면 잘해드리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5만 원권 한 장을 재벌 손자의 작은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맛있는 까까 사 먹어."라고 이야기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정말 나는 잘 우는 것 같다.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한 내가 대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 쓸데없이 대견했다. 쓸데없이. 그날 1년 넘게 느꼈던 좌절감, 해고에 대한 울분과 증오, 나 자신의 무능함과 그에 대한 자책, 가장으로서의 무책임 등등 짧은 시간 스쳐 간 감정을 눈물과 같이 흘려버렸다. 살면서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거나, 대견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다.


어린 시절 명절날 아침, 3대의 온 가족들이 모여 아침을 먹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때 돌을 씹었다. 돌 깨지는 소리에 다들 내 얼굴을 쳐다봤고, 맏며느리인 엄마의 당혹해하는 표정을 본 어린아이는 “김에다 굵은소금을 뿌렸네요.”라고 얘기하고는 삼켰다. 아버지는 “돌이면 뱉어라.”라고 하셨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남은 밥을 다 먹었다. 더 이상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 처음 내가 대견하다고 생각했는데, 40년 만에 나 자신이 다시 한번 대견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이런 날도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쓸데없어도.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잘렸던 회사에 재입사하고 싶다.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실력을 발휘해 주고, 회장님께 싹싹 빌면서 아부도 열심히 해봐야겠다.

“회장님 말씀을 몽땅 액자로 걸겠습니다.” 하면서.

그리고 잘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만두어 버릴 거다. 그래야 내겐 잘린 회사가 없을 테니까.

참 쓸데없는 이야기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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