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
“최 대리, 최 대리는 갑자기 돈이 생기면 얼마면 좋겠어? 누가 준다면 말이야, 꼭 필요한 돈은 얼마야?”
“전 2,300만 원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규모 개발 사업을 위해 설립된 SPC에 파견 나가 있을 때, 감사실장 출신 임원이 뜬금없이 돈 얘기를 한다, 누가 갑자기 내게 돈을 줄 일도 없고, 큰돈에 대한 개념이 없던 내게는 이상한 질문이었다. 더 이상한 건 내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한 금액이었다. 그 내용도 이야기했다.
“연세대 서문 쪽 연립주택 전세 보증금이 2,000만 원이고, 요새 진짜 좋은 보약 한 제에 50만 원 정도 한다고 하던데, 300만 원이면 부모님께 세제씩 달여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면 좀 괜찮아지실 것 같아서요.”
평소에 늘 생각하던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대답을 했을지 지금도 궁금한데 그때는 그리 대답했다. 가끔 생각해 봐도 난 생각이 좀 엉뚱한 것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대지 18평, 건평 7평짜리 낡은 집을 마련하고, 어머니는 우셨다. 드디어 이사 안 다니고 집주인 눈치 안 봐도 된다고 하시면서 참 좋아하셨다. 예전의 집은 하천변에 있었는데, 두 차례의 큰 홍수로 둑이 무너지고, 하천이 범람했다. 우리 집은 주변 가옥과 텃밭이 불어난 물에 떠내려간 홍수 피해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피해가 없었지만, 주변은 처참했다. 한밤중에 아버지가 나를, 어머니가 여동생을 업고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을 뚫으며 인근 학교로 피난을 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국 여차저차 그 집을 떠나 시내 쪽 전세로 이사했었다.
이번에 이사한 집도 그리 좋은 집은 아니었다. 보일러도 아닌 연탄아궁이이다 보니, 여름에 장마라도 오면 연탄아궁이가 물에 잠겨 물을 퍼내야 했고, 삭은 파이프를 시시때때로 갈아야 했으며, 겨울엔 새벽마다 잠 설치며 연탄을 갈아야 했다. 재래식 화장실이 마당에 있어서 밤마다 화장실 가기 무섭기도 했고, 겨울철엔 추위가 배설 욕구를 마구 억누르기도 했다. 그땐 뭐 다들 그리 살았던 것 같다.
대학 시절 소방도로 개설을 위한 도로 확폭으로 대지 일부와 외부 화장실은 헐려 나갔고, 그걸 막으려 주민설명회 자리에서 공무원에게 따져 묻기도 했지만, 공공에서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하는 일을 어찌 막으랴? 내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낙후된 동네는 재개발이 되었고, 부모님은 임대주택으로 이사하셨다. 몇몇 군데 더 이사하시다가 아버지 퇴임 후 퇴직금으로 지금 집으로 들어가셨다. 이젠 더 이상 이사하지 않으셔도 된다.
처음 서울로 올라와서 기숙사 생활을 잠깐 하곤 계속 이사를 다녔다. 갈매리 이모 댁, 천호동, 남가좌동, 홍은동, 무악동, 연신내 등으로 결혼 전까지 여러 차례 이사를 가야 했다. 내가 살던 지역은 지금은 옛 자취가 없다. 모두 재개발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회사 취업 후에도 계속 이사 다니는 게 곤욕이었다. 덕분에 이삿짐뿐만 아니라, 짐 싸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참 별게 다 자랑이다.
복학했을 때 고향 친구 자췻집에 놀러 갔는데, 연립주택 방 두 칸짜리 15평이 전세 2천만 원이란다. 학교 서문 쪽이라 다른 데 보다 좀 더 비싸다고 했다. 와, 이 정도면 훌륭하다 싶어서 머릿속에 2천만 원이 새겨져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 임원이 내게 물어볼 시점엔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셨고, 내겐 늘 걱정이었던 때여서 보약이라도 좀 지어드려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그 임원은 그날 밤 지방의 부모님을 뵈러 내려갔다가 다음 날 오후에 회사에 나오셨다. 내 얘기를 듣고 부모님께 미안했다고, 뵈러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나중에 얘기해 주셨다.
여동생이 부산에 있는 대학에 지원해서 어머니랑 같이 수능 시험 전날 내려갔다. 어머니께서 다니시는 교회의 부산 지회 중 한 군데서 여동생과 어머니의 숙소를 제공해 주었는데, 나에게까지 숙소를 제공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부산이 고향인 대학 동기에게 연락했더니, 방은 많으니 자기 부모님 집으로 오란다. 숙소를 해결해 준 것만도 고마운데, 집 근처에서 극진한 저녁 식사까지 대접해주니 어찌 신세를 갚나 싶었다. 방이 많다고 하는데 무슨 여관을 하시나 하는 생각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 집에 들어가니 진짜 방이 많았다. 내어준 빈방이 예전 살던 우리 집보다 컸다. 그때 처음 본 부잣집이다 보니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건 나랑은 다른 세상이려니 여기고 잊어버렸다. 그다음 날 아침까지 먹고 나오는데 부담감이 묘하게 올라왔다. 부에 대한 부러움이 사라질 정도로. 아직도 그때 그 기분을 표현하지 못하겠다.
한강을 건너가면 3, 40억 넘는 아파트가 상당히 많고, 100억 가까이 되는 아파트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간혹 뉴스에서, 아파트 부녀회가 ‘집값 싸게 내놓으면 안 된다’라며 매도자 협박하고, 집값을 담합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집값을 올리기 위해 난리들이다. 부동산 광풍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다. 난 좀 많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의견에 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기 집값을 올려서 그걸 팔고 더 좋은 다른 곳으로 가는 걸 뭐라 하겠느냐마는, 덩달아 오르는 집값에 정작 집을 구해야 하는 자식들 걱정은 하지 않는 건가? 본인들 집 팔아서 애들 집 사주려는 거지?
본인들이 집값 올려놓고 세금 많이 내야 한다고 정부 욕한다. 당신들이 그리 만든 거 아닌가? 뭐 돈 있는 사람들에겐 껌값이라고 느껴지겠지만, 평생 벌어 집 한 채 장만하고 노후를 맞이한 사람들은 진짜 하우스푸어 신세다. 팔리지 않으면 그냥 콘크리트 덩어리라는 걸 다들 잘 알 거다.
그나마 청년임대주택이니, 장기전세주택이니 하는 임대주택이 집 구하려는 젊은 사람들이나 저소득층에 기회가 되는 것 같은데, 이 또한 자기네 집값 내려간다고 집 근처에 생긴다고 하면 반대가 심하다. 놀부 심보도 이런 놀부 심보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이니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빈부의 차이가 생기는 건당연하지만, 나중에 당신 가족이 돈 없어서, 기회조차 없어서 거주할 공간을 구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한번 해봐라.
요새 신혼부부들은 혼인신고도 바로 하지 않는단다. 미혼일 때 청약기회나 조건이 더 좋다고 하니 말이다. 아예 결혼 생각도 없고, 아이 출산은 더더욱 생각도 안 한다. 우리 자식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 준거다. 출산율 저하, 인구 감소, 뭐 이런 사회적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무슨 문제든 원인은 있는 거다. 탐욕. 어른들의 탐욕.
결국, 강남에 오래된 고밀도 아파트들은 용적률 때문에 리모델링밖에 하지 못할 거고, 재건축 단지도 공사비 상승 및 규제들 때문에 분담금이 많이 걱정될 거다. 결국 점점 낡아가는 아파트를 몸테크로 감당하고 살아야 할 거다. 고밀도의 개발은 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모든 일에는 몸이 망가지든, 뭐가 되든 그에 따른 대가는 늘 있는 거다.
세상엔 있는 놈들이, 많이 아는 놈들이 더 무섭다. 모 코미디언이 이야기했다.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 나라 망친 적 있습니까? 다 더 배운 놈들이, 있는 놈들이 나라 망친 거 아닙니까?” 난 그 의견엔 강하게 동의한다.
음식점에서 음식 재료를 가지고 못된 짓하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먹는 거로 장난치는 거 아니다.’라고 한다. 사는 집 가지고 장난들 좀 치지 마라. 장난이 심하면 누군가가 다친다. 그 사람이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당신과 정말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는 거다.
이사를 하도 많이 해서 이사 다니기 너무 싫었다. 그나마 아내가 맞벌이하며 고생해 줘서 집 한 채 있다. 20년 지나서 집수리도 했고, 이제 다시 깨끗한 집에서 편하게 살고 있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방 하나씩 차지
하다 보니 내 방은 없다. 그동안 부동산 광풍이니 재테크니 시끄러울 때 이사 몇 번 다녔으면 집이 한 채 더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 않았다. 그냥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강북이라 집값이 오르지 않았지만 뭐 괜찮다. 그냥 내 기준에 집이란 게 이런 거고, 그래도 난 엄청나게 성공한 거다. 이사 안 다녀도 되고, 그리 이사 다니던 방 한 칸보다 넓은 집이 있으니까.
나는 내 자식들이 돈 벌어서 집 구하기 수월해졌으면 좋겠다. 이사 다니기 지치거나, 캥거루족처럼 나이 들어서도 같이 살자고 할까 봐 걱정이다. 우리 아이들도 어른이 되어 갈 거고, 자식들과 살아갈 그들의 집이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 내 방도 생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