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남극으로
사진설명 원양어선이 얼음에 빠져 못나온것을 같은회사배가 밧줄로 잡아당겨 구조하는 장면
2020년 10월 15일. 세상과의 마지막 연결을 끊고, 바다로 나갔다 부산항에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한 손에 단단히 여민 가방을 들고 원양어선에 올랐다.
목적지는 남극이었다.
4개월간, 35명이 넘는 선원들과 함께 떠나는 바다 위의 고립된 삶.
그때는 몰랐다.
이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연결’의 시간이 될 줄은.
배가 항구를 멀리 떠날수록, 신호는 점점 약해졌다.
오후 1시에 출항해 밤이 되었고, 일본해를 지날 무렵 핸드폰은 완전히 꺼졌다.
더 이상 인터넷도, 통화도 없었다.
세상은 내 손에서 사라졌고, 이야기해줄 친구도, 뉴스도, 나를 호출해줄 알림도 멈췄다.
무언가를 검색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 배 위에서 내가 아는 세상은 전부 끝났다.’ 그렇게 느껴질 만큼의 단절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배에 승선한 모두가 핸드폰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손끝이 허전했고, 심장은 가끔 조급하게 뛰었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 지금 이 순간에도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불안감. 나는 애써 무심한 척, 조리실로 향했다. 밥을 짓고 요리를 하는 것이 내가 이 삶을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조리장이었다. 새벽 3시에 눈을 떠 하루 세 끼를 준비하고, 야식까지 만드는 날이면 하루 네 끼였다. 반찬은 매일 같을 수 없었고, 배는 늘 흔들렸으며, 식자재는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피로 속에서 마음은 차츰 정리되었다. 칼질하는 리듬, 고기 굽는 냄새, 찜통에서 올라오는 김이 배 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조용히 알려주었다.
밥을 짓는다는 건 생존의 기술이었고, 동시에 마음을 조용히 덮어주는 이불 같았다.
누군가 말없이 밥을 두 번 퍼갈 때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말 한마디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는 묘한 연대감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선원 대부분은 외국인이었고, 의사소통은 기본적인 단어 몇 마디뿐이었다.
한국 사람들 역시 각자 일에 집중해 있었고, 티타임 같은 여유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름통 옆 낡은 플라스틱 박스에서 책 몇 권을 발견했다.
빛바랜 시집, 오래된 소설, 누군가 남기고 간 책들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펼쳤고, 그 순간 다시 세상과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결국 떠나기로 했다.” 그 문장을 다섯 번쯤 읽으며 눈을 감았다.
나도 어딘가에서 떠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주인공과 나 사이엔 물리적 거리는 없었다.
오히려 너무 가까워, 때때로 숨이 막힐 정도였다.
매일 식사 준비를 마친 뒤 작은 책상에 앉아 글자에 기대 잠시 현실을 벗어났다.
책은 사라진 세상의 대체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지는 ‘거울’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나를 읽었고, 이따금 울컥하며 책을 덮었다.
이상하게도, 한참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무언가를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타인의 언어로 달궈진 마음을 내 언어로 식히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짜장덮밥을 만들었다. 모두 잘 먹었다.
한국 선원이 ‘오늘 식사는 밥집보다 낫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이런 단순한 기록이 어느새 나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시간에, 내 글이 나를 대신 울어주었다.
가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럴 땐 ‘……’만 적었다.
그 침묵조차도 나에겐 충분한 대화였다. 고독은 처음엔 적이었다.
그러나 점점 익숙해졌다.
4개월의 고독은 천년보다 긴 세월처럼 느껴졌다. ‘일일이여삼추’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사진설명 남극의 일출
고독은 어느새 내 안을 정리해주는 조용한 정원사가 되었다. 가끔 조리실 바닥에 앉아 항해의 진동을 느끼며 조용히 숨을 쉬었다.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되었다.
핸드폰이 없어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엔 미칠 것 같던 시간들이 내 안의 고요와 평화로 변해 있었다. 2021년 1월 14일, 남극을 떠났다.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기분은 좋았지만 또 한 달을 항해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은 가벼웠지만, 바다 위의 한 달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2월 15일, 부산에 도착했다.
배는 다음 날 아침 입항 예정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모든 선원이 갑판으로 나와 육지에서 흘러나오는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장면은 하나의 풍경이었다.
4km 떨어진 육지의 신호가 이슬비 속에서 잡혔다가 끊기기를 반복했다.
삑삑삑— 수백 개의 알림과 부재중 전화가 쏟아졌다. 그 사이에서 나는 묘하게 조용했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4개월간 핸드폰 없이 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실은 외로웠던 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이번 항해로 단단해졌다.
지금도 육지에서 나는 가끔 하루 정도 핸드폰을 꺼둔다.
그 순간, 내 안의 상상력이 연기처럼, 불꽃처럼 피어오른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오른다.
“신의 영감이란, 수천억 개의 톱니바퀴가 동시에 맞물릴 때 온다.”
핸드폰 없이 지내던 그 시절, 나는 그걸 느꼈다.
수많은 생각의 톱니들이 맞물릴 때, 머릿속 어딘가에서 ‘영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4개월을 핸드폰 없이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웃으며 말한다.
“그때가 오히려, 내 정신이 하늘과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일주일에 하루 정도, 나는 여전히 핸드폰을 꺼둔다.
그럼 다시 남극의 별빛이 떠오른다.
눈을 감으면 우주가 내게 다가오는 듯한 기분.
"남극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만났고, 그 시간은 지금도 내 안에 조용히 살아 있다.
사진설명 4개월만에 부산항 도착 저녁 입항 대기중 석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