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살, 말없이 빛난 그날의 비〉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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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던 그날, 나는 한없이 작았지만,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던 반지하 방.

그 습기 어린 공간에서 나는 작고 오래된 거울 앞에 앉아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빗고 있었다.



창밖에선 빗방울이 묵직하게 떨어지고 있었고, 방 안은 늘 그렇듯 눅눅했다.


나는 스물여덟이었고, 칠 년 전, 스무 살의 봄날에 덜컥 임신을 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자퇴했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시작된 동거는 고작 일 년 만에 끝났다.



그렇게 남은 건 일곱 살이 된 딸아이와,

한 달 180만 원짜리 월급, 그리고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반지하방뿐이었다.

월세, 유치원비, 식비를 제하고 나면 통장엔 늘 3만 원도 채 남지 않았다. 그래도 감사하자고 다짐했다. 내 곁에 아이가 있으니까. 내 딸이, 내가 버틸 이유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시절 친구 초희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졸업 후 은행원이 되어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최근 오랜 연인과 헤어졌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풀 겸 나이트클럽에 가자며, 돈은 자기가 낼 테니 몸만 오라고 말했다. 망설였다.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택시를 타고 나가는 길, 죄책감과 기대가 묘하게 얽혀 있었다.



마음 한편에선 오랫동안 눌러둔 감정 하나가 꿈틀거렸다.

여자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영등포의 삼겹살집에서 초희를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세련됐고, 웃을 때마다 대학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다.


삼겹살에 소주 세 병, 맥주 두 병을 비우며 우리는 옛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오랜만에 많이 웃었고, 그게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밤이 깊자 우리는 초희가 자주 간다는 클럽으로 향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음악은 쿵쿵 울리고, 낯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웨이터가 우리를 룸으로 안내했고, 테이블에는 양주와 안주가 놓였다.



초희는 능숙하게 팁을 건네며 룸을 세팅했고,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내가 만든 세계는 아니었지만, 그날만큼은 그 안에 있어도 괜찮다는 마음이었다.

그때, 그가 들어왔다.

셔츠 단추 하나를 풀고, 은은한 향수를 뿌린 남자.



그는 내 옆에 조용히 앉아 잔을 따랐고, 말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눈빛이었다.


우리는 몇 잔의 술을 마셨고, 말은 적었지만 이상하게 편안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나’로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클럽을 나온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에 들렀다.


그는 꼼장어를 시켰고, 나는 바람을 맞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젓가락질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몇 잔의 소주를 나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가 말했다.


“오늘 오빠랑 같이 자자.”


그 말은 바람결 사이로 조용히 내 귓가에 내려앉았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마음 한구석이 오래 전부터 텅 비어 있었던 탓인지, 거절할 힘이 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지갑을 꺼내더니 내 가방 옆으로 봉투 하나를 밀어 넣었다.


“목욕비야,”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속에 담긴 무게는 묘하게 내 마음을 흔들었다.



돈으로 가치를 매기는 그 순간, 모욕감보다 먼저 다가온 감정은 해방감이었다.


누군가 나를 ‘값’으로 대했지만, 그 시선만큼은 내 존재를 무시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건 이상하게도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마음 한켠은 오래된 감옥에서 문 하나가 열린 듯 고요했다.




그날 밤은 특별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잊히지 않는다.


나를 바라보던 눈빛, 스쳐가는 손길,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았던 그 감정.


다음 날 아침, 그는 조용히 나갔다.

나를 깨우지도 않았고, 떠난 자리엔 짧은 쪽지가 남아 있었다.


“잘 자요. 당신은 충분히 예뻤어요. 그리고, 당신 잘 살 거예요. 분명히.”



나는 울었다. 조용히, 그러나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날 이후,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반지하에서 살았고, 월급은 그대로였고, 아이는 내 품에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분명히 달라졌다.

나는 가끔 화장을 했고, 머리를 단정히 말렸다.

초희와 소주 한 잔을 나누는 날도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글을 내 작은 서재에서 쓰고 있다.


커피 잔을 옆에 두고, 창밖으로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딸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작은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며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더는 반지하가 아닌 곳에서, 더는 허덕이지 않는 하루를 살고 있다.



내 삶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더 단단하고 따뜻하다.



지금의 나는 그날을 잊지 않는다. 그날의 비, 그리고 그날의 나.


나는 조용히,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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