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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 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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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의노래 Jun 15. 2022

엄마 마중 1. - 엄마 마음에 머무는 중입니다.

54년생 소녀의 꿈을 따라서

#1.

나는 6.25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에 김 씨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어. 내 뒤를 이어 남동생 셋과 여동생 둘이 더 태어났지. 우리 엄마 말씀으로는, 처음 시집왔을 때 집에 먹을 것도 살림살이도 없이 냄비 하나만 덜렁 있었대. 그렇게 우리 엄마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어. 암에 걸린 시아버지와 등이 굽은 시어머니, 그리고 밥벌이에 그다지 소질이 없는 남편과 자식들 여섯 남매까지. 우리 엄마가 건사해야 할 가족은 무려 아홉 명이나 되었고, 거기에 엄마의 동생들까지 돌보아야 했으니 우리 엄마는 자의 반 타의 반 악착같이 살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엄마와 친할머니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나마 밥은 먹고살 수 있었어. 엄마와 할머니는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쫓아다니느라 자주 집을 비우셨어. 나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엄마'역할과 '며느리'역할을 이어받게 되었지. 엄마가 안 계시는 동안에는 동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막내 동생을 등에 업은 채 여기저기서 먹을 것들을 구해와야 했어. 젖먹이 동생을 먹이기 위해 보리죽 냄비에 고인 숭늉 한 방울이라도 긁어모아야 했고, 집에서 먹고 쓸 만한 것들을 시간 날 때마다 얻으러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어. 그렇게 날 위한 것은 하나도 없이 그저 배고픔만 면한 상태로 엄마의 아바타처럼 살아내야 했지.     


우리 엄마는 모르지만 나는 어릴 때 꿈이 있었어.

‘부자가 되는 것’

너무 시시하고 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땐 그랬어. 내가 가난해서도 아니고 동정심이 많아서도 아니야. 막연하지만 그냥 부자가 되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어.      


그 꿈은, 막내 동생을 업고 젖동냥을 다니면서, 암에 걸린 할아버지의 병시중을 들면서, 한겨울 냇가에서 맨 손으로 열 식구의 빨래를 하면서, 땡볕 아래에서 거친 밭일을 하면서 어느덧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어. 얼마 전 내 딸이 어릴 적 꿈이 뭐였는지 묻기 전까지는 말이야.          




#2.

나는 1977년, 김 씨 성인 엄마와 오 씨 성인 아빠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어. 위로는 오빠가 한 명 있었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잘 몰랐지만 적어도 우리 집이 가난하지 않다는 정도는 알았던 것 같아. 나는 늘 주인집 딸이었고, 엄마는 때가 되면 새 옷을 사주시고, 매일 저녁 새롭게 만든 반찬들을 꺼내 주셨지.   


그런데 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억척스럽달까, 어딘가 아이 같지 않은 구석이 있었어. 엄마가 설거지하면서 물을 틀어놓으면 물 낭비라며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화장실에서 휴지를 쓸 땐 최대 세 칸까지만 사용하려고 했지. 어딜 가든 전기불이 꺼져 있는지 늘 확인하고 말이야. 그렇게 어려운 형편도 아닌데 어린아이가 왜 그렇게 빡빡하게 살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      


나는 으레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꿈이 자주 바뀌었어. 피아니스트, 성악가, 선생님 등등. 그런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꼭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 생겼어.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막연하게나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졌지. 그래서 마흔 살이 되면 생업을 그만두고 봉사를 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는 게 내 꿈이 되었어.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저 누군가 돈이 없어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을 보면 그이에게 밥을 사줄 돈이 없는 게 아쉬웠고, 친척이 힘들게 산다는 얘기를 들으면 돈을 많이 벌어서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런데 그 꿈은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월급이 주는 안정감에 밀려 내 삶에서 외면받게 되었고, 어느새 한 여름밤의 꿈처럼 아득하기만 한 몽상이 되어버렸어.           




1977년에 태어난 나는 이제 중년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리고 40여 년의 지난 삶 동안 지켜본 나의 1954년생 엄마는 지독히도 외롭고 지독히도 인내하고 지독히도 슬펐습니다. 언젠가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처럼 그렇게 애처롭고 그렇게 아슬아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왠지 엄마랑 같은 삶을 살면 안 될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 엄마랑 닮지 않아야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인생의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엄마의 삶에 최대한 무관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여 내 아이를 키우다 보니 문득 엄마가 궁금한 순간들이 많아지더군요.

'엄마는 그때 왜 그렇게 살았을까?'

'엄마는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늘 혼자 삭이고 가슴에 묻어두기만 하던 엄마의 삶이 이대로 외면당한 채 세상에서 사라져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기 내어 엄마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엄마, 엄마는 어릴 때 어땠어?"

엄마가 말했습니다.

"뭘 어때, 똑같지. 아유 몰라, 난 어릴 때 너무 고생하고 힘들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엄마는 어릴 때 꿈이 뭐였어?"

엄마가 먼 곳을 응시하며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그냥 부자가 되고 싶었어. 부자가 되어서 없이 사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어. 이유는 없어.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냥 그랬어."


엄마와 나는 우리의 잊힌 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만 묻어둔 우리의 꿈이 놀랍게도 같았다니요.   


나는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와 닮아 있었습니다. 삶의 모습도 어린 시절의 꿈도. 하지만 그것은 나쁜 것도 패배자가 된 것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엄마와 내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음에 전율과도 같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곤 이내 슬픔과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진작에 엄마 이야기를 물어봐 주었다면 엄마의 삶은 조금 덜 외롭고 덜 아슬아슬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힘들 때 위로 한마디 건넬 수 있었다면 엄마는 조금 더 많이 웃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의 삶에 무심했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삶에 박힌 고단함과 성실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꼭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엄마, 잘 살아오셨어요. 그렇게 힘든 시절을 엄마는 참 잘 살아내셨어요."  


나는 이제부터 엄마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잊힌 꿈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닮은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오면 엄마에게 말하고 싶어요.   

"엄마, 우리가 해냈어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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