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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의노래 Jun 29. 2022

열 살 소녀의 십 년 묵은 체증

아! 아! 들리세요?

나는 10살의 귀하고 귀한 외동딸이다.

내가 얼마나 귀하냐면, 우리 엄마 뱃속에 잉태된 여섯 아이 중, 세상에 태어나 엄마 밥 얻어먹고 사는 아이가 유일하게 나 하나니 말 다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엄마는 임신 15주부터 나를 엄마 뱃속에서 강제로 꺼낼 때까지 거의 매주 주말마다 여행을 다녔다.

안 그래도 노산인 엄마가 무슨 체력이 그리도 좋은지, 금요일만 되면 퇴근하자마자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아빠와 함께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를 동서남북으로 질주했다. 덕분에 난 학교에서 사회와 지리 성적이 잘 나오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짜증이 나서 엄마 배를 발로 뻥 찬 적도 있다.


한번은 만삭의 엄마가 낯선 바닷가의 해안로가 예쁘다며 두 시간여를 산책하다 택시도 다니지 않는 시골길에서 헤맨 적이 있었다. 다행히 히치하이킹으로 숙소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때 난 엄마가 걸을수록 점점 조여드는 뱃속에서 내 몸이 엄마 몸 밖으로 튕겨나갈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자궁 속에서 버티기 위해 조막만 한 내 두 손 두 발을 자궁벽에 붙이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버텼던지 양수 속에서도 내 짜디짠 땀 맛이 날 정도였다.


또 한번은 내가 예정일을 일주일 넘기고도 엄마 뱃속에서 유유자적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어차피 일찍 나가면 공부도 해야 하고 할 것도 많아서 가급적이면 백수 시절을 오래 즐기고 싶었는데, 엄마는 나에게 초강수를 두었다. 바로 매일 계단 오르기와 효창공원 열 바퀴 돌기였다. 결국 엄마는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양수가 터져버렸고 나는 급기야 소 부족 상태에 빠졌. 급한 마음에 출구를 찾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엄마 뱃속에서 15시간 동안 씨름을 한 끝에 간신히 목숨만은 붙은 채로 세상 밖으로 구출될 수 있었다.


우리 엄마의 별난 행동을 말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뭐, 이런 엄마 덕분에 나름 뱃속에서 흥미진진한 시간을 보냈던 나는 앞으로 엄마와 함께 할 모험 가득한 나날에 대한 부푼 기대감에 설레기도 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우리 엄마는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자 180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에게 무한한 자유와 재미를 줄 터프한 사람이라는 내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왕소심쟁이인 데다 아이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탓에 나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울어도 안고, 업고, 나오지도 않는 젖을 시도 때도 없이 물리는데, 먹기 싫다고 울면 울수록 더 젖을 물리니 물고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걷기 시작할 때는 넘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봐 옆에서 두 팔과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며 걷는 바람에 엄마한테 걸려 넘어질 뻔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종이 오리기 배운 것을 엄마한테 보여주려고 가위를 집기만 하면 위험하다며 뺏어가는 바람에 가위질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게 될 즈음에는, 발 빠른 엄마에 의해 세팅된 친구들과 체험 다니랴,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랴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정작 내가 놀고 싶은 아이와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마음껏 놀아보지를 못했다.


이렇듯 뭐든지 다 해주는 엄마 덕분에 난 대근육과 소근육이 발달 미달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또래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다 보니 친구 사귀는 게 꽤나 피곤하게 여겨졌고, 나보다 어린 동생들한테 물건을 뺏기거나 맞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다 지난 일이고, 나도 우리 엄마도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과거를 회상하자니 당시에 느꼈던 분노와 좌절감이 다시금 생각난다.


이에, 나는 딸을 가진 세상의 겁쟁이 엄마들에게 감히 고한다.

1. 나도 좀 해 보자. 가위질 하기, 일어서서 그네 타기, 친구 사귀기, 친구와 화해하기, 속상하기, 외롭기, 혼자 놀이터 가기 등등 엄마만 해 본 것들 나도 좀 해보자.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나는 좋고 나쁜 것도, 내게 좋은 사람과 안 좋은 사람도 구분할 수 없다. 직접 겪고 극복해 보지 않으면 작은 상처에도 쉽게 포기하고 무너질지도 모른다. 상처받고 힘들다고 내가 쉽게 죽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겐 엄마가 있으니까. 그러니 만날  '라떼는' 이라는 말만 하지 말고 제발 엄마가 해 본 것들 나도 좀 하게 해 주라.

2. 딸의 체면을 살려주자. 내 대근육과 소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의 답답함을 아는가. 게다가 가위질도 잘 못하는 내 모습을 친구들에게 들켰을 때 딸의 체면이 얼마나 구겨지는지 아는가. 남들이 하는 것들은 대부분 나도 잘할 수 있다. 친구들 앞에서 어깨 으쓱할 수 있게 딸 체면 좀 살려주자.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아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덕분에 나도 내가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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