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부터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주위 사람들한테 자랑을 했다. 22년 11월 마라톤 대회 경험까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대부분의 반응은 ‘대단하다.’ ‘어떻게 달리기를 해’ , ‘난 못해’라고만 하고 동참하고 싶어 하는 반응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동아리 동생 한 명이 관심을 보였다.
"나도 학창 시절 운동 잘했는데… 언니 나도 하고 싶다."
처음 들을 때 그냥 말만 하는 줄 알았다. 두 달 후 혹시나 하고 달리기 하는지 물어보니 ‘런데이 앱’을 통해 초보자 과정 코스를 진행 중이었다. 초보자 코스는 내가 처음 달리기를 접했을 때 훈련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1분 달리기부터 시작해서 두 달 후에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코스이다. 말뿐이 아닌 진짜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동생은 한 달 정도 연습을 꾸준히 하면 30분 달리기가 가능해 보였다. 마라톤 대회를 같이 나가자고 카톡을 보내봤다.
"ㅇㅇ야 3월에 하는 마라톤 대회 나가볼래?"
곧장 답장이 왔다.
"좋아 언니"
"그래! 그럼 각자 얼렁 접수하자."
우리는 3월 18일에 열리는 코리아 오픈 레이스 대회의 5킬로미터 부분에 온라인으로 신청했다.
신청도 했으니 이제 할 일은 달리기만 하면 된다. 가끔 달리기 연습하러 나갈 때 그녀를 불러냈다. 함께 천천히 달려보았다. 중간중간 동생이 지칠만하면 속도를 늦추면서 함께 달렸다. 혼자서 30분 달리기를 할 때면 지루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니 금세 30분이 지나버렸다. 평소보다 속도를 늦추면서 하니 덜 지쳤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달리기인데 좋아하게 되었다. 주위에 선한 영향을 주면서 동행자까지 생겼다는 게 더더욱 행복했다.
나의 첫 번째 마라톤 대회는 손기정 마라톤 대회였다. 대회규모가 어떤지도 모르고 일단 신청한 거였다. 혼자서 뻘쭘하니 대회장을 돌아다녔다. 여기저기서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로 잠실 종합운동장은 들썩들썩했다. 대회 시작 전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마라톤 대회하면 출발시간 전에 모여서 달리기만 하는 줄 알았다. 예상밖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부모님들, 심지어는 유모차를 끌고 가는 가족도 있었다. 연인이나 친구들끼리는 손잡고 걷다가 뛰다가 했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재미 삼아 출전을 했는지 지쳐도 웃으면서 나아갔다. 기록이나 완주만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라톤대회는 함께 모여 어울릴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준 거다. 나는 그저 앞사람 머리꼭지만 보면서 따라잡으려고 애쓰면서 달리기만 했다. 앞, 뒤, 옆에서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평소 달리기 페이스보다 빠르게 진행했다. 혼자 뛸 때면 지쳐서 자연스레 속도가 늦춰지기 마련이다. 대회장에 오면 경쟁심리가 생겨서인지 처음속도를 유지하려고 애쓰게 된다. 평소에는 차가 달리는 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또한 남달랐다. 그동안 침범하지 못했던 영역을 내 마음껏 점령한 듯한 느낌이 든다. 경기 전후에 기념사진 찍기도 또 하나의 즐거운 이벤트였다. 난 혼자라서 셀카로 못생긴 내 얼굴만 찍었다. 모두에게 주어지 기회지만 아무나 올 수 없는 놀이터에 혼자만 있는 게 아쉬웠다. 다음에는 누군가와 꼭 함께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녀와 함께 출전하게 될 3월 마라톤 대회를 준비할 때부터 동행자가 있다는 생각에 대회날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재미난 것을 누군가에게 전파할 수 있다는 것도 뿌듯했다. 대회당일날은 기념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메달을 받고 목에 걸고 기념사진 단상에서 여러 가지 포즈도 해보았다. 20,30대들이 사진 찍는 포즈를 유심히 보았다. 우리는 고작해야 손가락 브이를 하거나 메달을 입으로 깨무는 제스처만 하면서 찍어보았다. 젊은 여자분들은 멋진 레깅스 차림으로 뒷모습을 서로 찍어주었다. 다리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다양한 포즈를 연출했다. 근육질 몸매를 가진 남자들은 웃옷을 살짝 제치며 왕자 복근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와 나도 서로 뒤돌아서 한쪽 다리를 옆으로 살포시 올리고 찍어보았다. 뒷줄에 있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서로를 당연히 찍어주려고 준비된 사람들 같다. 다 함께 즐기는 축제분위기의 흥을 끌어올리는 거다. 완주 후에 땀내가 가시기 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대회장의 빈자리를 찾아서 땅바닥에 앉았다. 나눠주는 바나나, 빵, 음료수를 먹으면서 달릴 때 기분을 되짚어 보기도 했다.
5킬로 부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출발하고 나서 30분~40분 사이에 대부분 도착한다. 이후에 10킬로, 하프 참가자들이 들어온다. 땀에 절어서 골인지점을 통과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난 또 다른 다짐을 해본다.
"다음에는 10킬로 대회에 나가볼까?"
"좋지 언니!!!"
우린 6월에 예정된 새벽마라톤 대회를 또 신청했다. 이번에는 10킬로 부분이다.
대회를 신청했으니 연습을 해야 한다. 이제는 한 시간 정도를 달려야 한다. 아직 속도를 높이기보다는 한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을 목표로 진행하고 있다. 함께 갈 친구가 있으니 연습과정도 더 신난다. 목표점까지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한 거구나 싶었다.
얼마 전에는 그 동생이 이렇게 말했다.
“언니 보스턴마라톤 대회 가자”
“00야 그전에 도쿄마라톤대회 먼저 나가자. 보스턴은 너무 멀어서 좀 부담된다. 일단 짧게 도쿄먼저 찍자”
우린 서로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막연한 희망이 아닌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가 되어버렸다. 비록 두 대회에 참가하려면 아직 우린 역량이 부족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우스갯소리로 떠든 게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을 점쳐보았다는 게, 달리기에 진심인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는 게 그저 기뻤다.
혹시 아는가? 우리 둘이 2-3년 후쯤 보스턴 대회 스타트 라인에 서있는 날이 올 수도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