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 중에는 ‘세미누드로 사진을 찍겠다’는 항목이 있다.
그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2004년 제주에서 활동하셨던 고 이선희님의 누드사진과 기사를 보고 나서였다.
나는 누드를 젊고 아름다운 몸을 가진 비장애인의 전유물이라고만 여겼다.
비틀리고 구부러진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 비틀어진 몸을 조금이라도 가릴 수 있는 옷을 벗어버리고 “나도 살아 있다. 내 몸도 아름답고 존엄하다”고 말하며 카메라 앞에 섰다는 사실, 그 용기가 너무나 멋지게 느껴졌다.
고 이선희님의 누드작품은 그 어떤 유명 화가들의 누드화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치열해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나도 언젠가는 누드를 찍겠다는 욕망을 가지게 된 것이 처음에는 막연한 동경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중증장애를 가진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사회가 만들어놓은 미적 기준 장애가 없고 젊고 마른 몸만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기준 속에서 내 몸이 시민으로도, 여성으로도 ‘쓸모없는 몸’으로 취급되는 현실을 나는 온몸으로 경험해왔다.
그래서 나는 비틀어지고 늘어지고 볼품없다고 불리는 이 몸을, 그 안에 담긴 생명으로서의 아름다움과 반짝이는 숨결들, 치열하게 세월을 부딪쳐온 흔적들을 카메라의 눈에 담고 싶다.
어떤 몸이든 무한한 우주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며 이 사회와 연결된 몸 그 자체만으로도 존엄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이 욕망을 단순히 ‘누드를 찍고 싶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노출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정치다.
사회는 늘 내 몸을 관리되어야 할 대상, 보호되어야 할 객체, 보여지지 말아야 할 결함으로만 호명해왔다.
중증장애 여성의 몸은 언제나 섹스의 장에서 추방된다.
우리는 욕망하지 않는 존재로 설정되고,
욕망받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밀려난다.
그 과정에서 내 몸은 시민권을 박탈당할 뿐 아니라 성적 주체성마저 몰수당한다.
이 사회에서 섹스와 섹슈얼리티는 상품화된 미적 기준 위에 세워진다.
젊고, 마르고, 장애 없고, 비틀어지지 않은 몸.
그 기준에서 벗어난 몸은 보지 않는 것이 예의’가 된다.
그리고 그 예의는 곧 차별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래서 내가 누드를 찍고 싶다는 말은 ‘야하다’거나 ‘도발적이다’라는 말로 절대 축소될 수 없다.
이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돌봄의 객체가 아니라 욕망하는 주체로 존재한다.
나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주체로 이 세계 안에 서 있다.
중증장애 여성의 몸은 늘 가려져 왔다.
휠체어 위에 앉은 몸, 경직된 관절, 비틀린 척추, 늘어진 근육.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쪽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비틀어짐 속에야말로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몸은 실패한 몸이 아니라 버텨낸 몸이다.
살아남은 몸이다.
정상성의 폭력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지금 여기까지 온, 기록된 역사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 이 몸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몸을 주체로 복권시키고 싶다.
성은 생식도 아니고, 서비스도 아니고, 상품도 아니다.
성은 내가 나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맺는
가장 근원적인 관계다.
그 관계에서 내 몸은 결코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믿는다.
사회가 ‘쓸모없다’고 지워온 이 몸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섹슈얼리티를 품고 있다고ᆢ비틀어진 몸, 느린 몸, 의존적인 몸, 이 몸들은 경쟁과 생산의 논리를 거부한 채 다른 리듬, 다른 시간, 다른 접촉 방식을 제안한다.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장 치열한 반란이다.
그리고 이 욕망은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나는 고 이선희님의 누드사진을 보며 처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저분이 길을 먼저 만들어갔구나ᆢ
그 선배의 용기가 나에게 욕망을 허락해주었다.
“중증장애 여성도 자신의 몸을 말할 수 있다”고,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나는 그 선배의 길 위에 서 있다.그리고 더 나아가 나 또한 누군가에게 욕망을 허락해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
휠체어 위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을 보며 부끄러움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면 그 시작에 내 사진 한 장이 놓여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누드로 카메라 앞에 선다면 그건 노출이 아니라 선언일 것이다.
나는 숨 쉬는 존재다.
나는 욕망하는 시민이다.
나는 이 사회와 연결된, 살아 있는 몸이다.
그 한 장의 사진은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사진이 아니라 존엄을 탈환하는 사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몸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비틀어진 몸이야말로
내가 살아왔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