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샤워를 하며 유투브로 EBS 골라듄다큐가 만든 칼마르크에 자본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전 다시 읽은 전태일평전을 읽으면서 22년의 전태일 열사에 삶을 다시 보며 슬펐던 마음이 계속 올라왔었다.
오늘 칼마르크에 삶과 자본론에 대해 듣다보니
칼 마르크스와 전태일은 왜 그렇게 다른 삶을 살았고 전혀 다른 방식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었다ᆢ
둘 다 자본주의를 비판했고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와 평등을 고민하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나름의 결론은 이것이다.
유럽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과 북으로 나뉜 파괴된 땅의 차이.
충분한 배움의 차이.
가족과 친구들의 차이.
그리고 나이와 경험의 차이.
이 모든 조건들은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로 작동하며 두 사람의 삶에 극렬한 차이와 차별과 극한의 삶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사유할 수 있는 시간과 언어와 동료와 토론의 장이 있었다.
전태일은 전쟁 이후 산업화 공장의 바닥에서 스물두 살의 몸으로 세계를 감당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전태일의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구조가 밀어 넣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현재도 여전히 전태일들을 만들고 있고 김순석들을 만들고 정태수들과 최옥란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치와 노동은 얼마나 생산했는가로만 논의할 수 없다.
노동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의 문제이고 정치는 성과가 아니라 누가 인간으로 인정받는가의 문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약자를 향한 분노와 혐오를 정치 자원으로 사용하는 사회로 점점 트럼프화 되어 가고 있다.
권리는 특혜로 말해지고 복지는 낭비로 취급된다.
그 속에서 전태일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 된다.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투쟁하다 음독으로 생을 마감한 뇌성마비 여성 중증장애인 최옥란.
서울 거리의 턱을 없애달라 노점상이라도 하며 살게 해달라 외치며 분신한 중증장애인 김순석.
장애인도 시민이다를 외치며 이동권 투쟁의 현장에서 삶을 소진한 정태수.
이 이름들은 한국 사회의 실패 보고서다.
마르크스는 이론을 남겼다.
전태일과 최옥란과 김순석과 정태수는 한국 사회의 기록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록을 읽지 않고 다시 덮으며 또 다른 열사를 준비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전태일들을 만들고 있는가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