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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떡믈리에 Oct 25. 2022

떡볶이 시험? 사랑에 시험을 치나요?

중간고사를 마친 날 초림역 베테랑에서


서점에서 우연히 '연애고사 시험지'라는 것을 보았다. 사랑에 시험을 치다니. 이 나라는 정말 시험을 좋아한다. 차마 구입은 못하고 샘플 문제를 찾아보니, '연인의 방귀 소리를 듣고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묻는 객관식 문제가 있었다.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본인도 늘 주창하는 바이다. 그러나 시험을 치고 채점을 하는 과정은 재미로도 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사랑의 영역에 정답이라든가, 기준이라든가, 요건, 점수 등을 개입시키기 시작하면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격증 유무나 보유자산의 커트라인 등으로 가입을 심사하는 소개팅 애플리케이션만큼이나 우리를 오염시킬 수 있다.


사견을 늘어놓자면, 저런 형태의 필기 시험은 대상을 어떤 특정 각도에서 특정 시간에 찍은 한 장의 사진과도 같은 것이다. 어떤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다른 각도를 비춰내지 못하고, 다른 시간을 살펴보지 못하며, 대상이 움직이는 모습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평가 제도는 그런 시험을 지나치게 편애한다. 그래,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평가 대상자들에게 문제를 풀게 하고 그 점수로 줄을 세우는 것의 편리함에 취해서 다른 선발 방법을 위해 그다지 노력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그리고 노력하지 않아서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서는 다른 선발 방법은 불공정해서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불공정의 문제는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고 이는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다. 시험이라고 항상 공정한가? 내 생각에 시험은 단지 공정해 보이도록 관리하기가 가장 쉬울 뿐이다.


시험의 장단점에 대한 논쟁은 그렇다 치고, 우리 사회가 시험을 통해서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랑에도 시험을 치려는 시도를 목격한다. 재미로 한다고는 하지만 고득점 하면 상대방은 만족할 것이고 아니면 무언가 말이 이어질 것이다. 각자가 획득한 점수에 큰 차이가 나면 역시나 문제가 발생하리라. 싸움이 날 수도 있겠지. 다 상대방을 시험 봐서 평가하고자 하는 욕망의 말로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 말로는 투덜대더라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상함, 꼭 잡아주는 손, 같이 지내온 시간, 함께 세운 계획 등등에서 우리는 사랑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떤 수단을 통해 평가하려고 하면, 특히 상대에게 시험을 치게 하고 채점해서 오답을 가릴 의지를 보이면, 불행의 신은 우리의 문을 두드린다.


떡볶이와 관련해서도 시험을 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자체도 불편했지만 문제를 찾아보고서는 더욱 불편해졌다. 유명한 떡볶이집을 많이 가봤다고, 가봤던 떡볶이집을 잘 기억한다고, 어떤 가게의 토핑을 기억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떡볶이와 관련해서 더 나은 지식이나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인가. 부조리하고 부정의하다. 대체 그것으로 뭘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 시험의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출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꼭 다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나처럼 떡볶이에서 행복을 찾고 사랑을 이야기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인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배워왔지만, 행복과 사랑이 어디 타협할 수 있는 영역이더냐. 다툴 수밖에 없겠다.


시험은 어떤 것이더냐? 고독하고 답답한 일이다. 시험이 정해진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시험을 중심으로 짜인다. 계획이 필요하다. 시험을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 주어진 시간을 누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공부할 것인지의 경쟁이다. 시험은 친구도 빼앗아 간다. 자의든 타의든 함께 만나서 놀 기회는 줄어든다. 불편해하면서 노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라지만 불편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일렬로 줄을 서게 되는 것도 고역이다. 가능하다면, 원하고 바라는 것을 두고 친구들과 일렬로 서기보다는 동그랗게 둘러 서고 싶다. 그래서 피하고 싶다. 격하게 피하고 싶다 시험이여.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것은 죽음과 시험 아닐지.


생각건대 연애고사나 떡볶이 시험이나 다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래 다 먹고살자고 벌이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평가제도니 학창시절의 시험들도 역시 사교육 시장을 감안하면 다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은 중요하다. 다만 사랑과 행복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시험 같은 건 좀 치워줬으면 좋겠다. 재미로라도 침범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떡볶이 시험 잘 치겠다고 떡볶이집 위치나 토핑 외우고 있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나.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친구다. 친구끼리는 둘러앉아서 떡볶이를 먹으면 되는 것이지, 시험 치고 채점해서 일렬로 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선 넘지 말자. 한 번 선을 넘으면 그 행위자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선이 다시 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떡볶이 시험 고득점자라면서 대학입시에 자료를 내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나? 특정 기업에 입사할 때 입사 스펙처럼 활용되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나? 이미 어떤 사람들은 그 시험 성적을 가지고 여기저기 자신을 PR 하고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시험은 고독하고 답답한 일이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 끝나면 (공부를 충분히 했건 하지 않았건) 해방감을 느꼈다. 시험 마지막 날은 친한 친구들과 뭉쳐서 집 가까운 번화가로 놀러 나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몇 학년 때였던가, 중간고사 기간의 마지막 시험을 마친 그 때 문득 혼자 있고 싶은 그런 날이 있었다. 시험이 피곤해서 그랬는지 어떤 심리적인 이유에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시험이 끝나 들떠있는 친구들에게 새삼스럽게 양해를 구하고, 굳이 몇 정거장 떨어져 있는 초림역(현 수내역)으로 향했다.


베테랑에 앉아서 떡볶이 1인분에 튀김 1인분, 순대 1인분을 시켰다. 뜨끈한 어묵 국물을 숟가락으로 천천히 음미했다. 떡볶이가 나왔다. 조심스럽게 긴 파를 숟가락에 올리고 떡을 포갠 후 이를 어묵에 싸서 먹었다.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혼자 먹는 떡볶이가 '아 시험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해 줬다. 아마도 그 때 나는 이걸 필요로 했던 것 같았다. 치열하고 떠들썩하게 놀기보다는, 조용하게 그러나 시간을 아주 사치스럽게 씀으로써, 그렇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해방감을 얻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날 나는 떡볶이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요즘도 나는 빡빡했던 일정이 휩쓸고 지나간 때면 혼자 천천히 밥 먹는 것을 즐기곤 한다. 운때가 맞아서 베테랑에 갈 수 있으면 더더욱 좋다. 치열해야 하는 어떤 영역을 떠나서 해방감을 얻고 싶다. 그래서 종종 혼자 떡볶이 집에 간다. 떡볶이는 해방이어야 한다, 사랑이어야 한다. 시험에 가두어져 고통받는 것은 다른 것들로도 충분하지 않나. 그러니까 부디 사랑만큼은, 떡볶이만큼은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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