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대구에서 선배를 만났다. 그는 대학시절 마당극으로 시작해, 사회에서 극단을 만들어 활동하다, 지금은 뮤지컬 제작과 연출까지 하는 전방위 예술가로 살고 있다. 그런 선배의 광범위한 활동영역에 놀라웠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와 대구라며 만나자했다. 단둘이 만나는 건 사실 그날이 처음이었는데, 많은 경험을 듣는 동시에 그의 방대한 독서량과 시를 사랑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놀라웠다.
대화가 한창 깊어질 즈음, 선배가 12월 8일에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사실, 극단에서 진행하는 기획 프로그램이 있어 바쁜 상황이었지만, 선배의 제안을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딤프(DIMF)에서 주관하는 뮤지컬 아카데미 결과 발표회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평소, 지역 매체를 통해 뮤지컬 배우와 극작가를 꿈꾸는 이들에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거리를 뒀던 나였는데, 갑자기 결과 발표회를 보러 오라니. 그런데 프로그램의 취지와 과정을 말하는 선배의 얼굴엔 순수한 열정이 느껴졌다. 그의 화술에 이끌려, 스케줄을 조연출에 부탁한 채 극장으로 갔다.
발표회의 분위기는 무엇보다 진지했다. 총 11개의 팀이 9개월간 워크샵을 거쳐 결과물을 시연하는 형식인데, 참여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온 가족과 친구, 공연 관계자들로 객석은 가득했다. 그 중 눈여겨 볼 만한 점은 전문 멘토들이다. 뮤지컬 극작가부터 시작해, 연출가, 작곡가 등 필드에서 활동 중인 멘토의 지속적인 피드백과 코칭이 9개월 동안이나 있었다 한다. 나는 발표회를 참관하며,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의미 있었는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참여자들의 장면이 완성도 높은 작업물이라기보다, 그들이 발굴해낸 소재와 멜로디는 쉽사리 현장에서 체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과물을 보면서 멘토의 방향성이 참여대상에 잘 맞추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딤프 아카데미의 프로그램은 창작자 과정과 뮤지컬 배우 과정으로 구성되는데, 창작은 극작과 작곡을 중심으로 텍스트와 총보를 디자인하는 방법론을 배우고, 뮤지컬 배우 과정은 연기, 노래, 춤, 움직임 등을 배우는데 집중한다. 두 트랙 모두, 공연을 위한 공연이 아닌, 자기 언어를 찾는 프로세스를 각 멘토의 노하우를 기반으로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농구를 소재로 한다던지, 한국산 호러를 메인컬러로 선택하는 등의 소재 선정은 나로서도 인상적인 작업물을 만난 순간이었다. 그들의 행위를 보며, 작업물로 발전하기 위해 멘토들이 선택한 방식이 이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참여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하며, 완주할 때까지 응원해서 이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만 해도 공연문화도시를 추구하는 대구의 이미지가 전국에 각인되지는 않았다. 국제오페라축제가 매년 열리고, 현대 음악가를 위한 대구국제현대음악제가 시작되었으며, 시내 한복판에서 전세계 퍼레이드 공연팀이 공연을 하는데도 아쉬움은 있었다. 그 중 가장 전국에 알려진 프로그램은 단연 딤프다. 출범할 당시, 뉴욕시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한국의 브로드웨이를 표방하며 시작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주변의 우려를 안고 20년을 묵묵히 달리니, 국내외 프로그램이 대구를 찾게 되고 많은 뮤지컬 관객과 예술가들이 축제의 주인공이 되어왔다. 하지만 공연 중심의 프로그램에서 그친 지난 시간이 개인적으로는 좀 더 연속성을 띄길 바랐는데, 딤프 아카데미의 발표회를 보며 이것이야말로 축제가 끝나도 연속될 수 있다는 사례로 남을 것이라고 봤다.
이처럼, 지속가능한 공연이 되기 위해선 사람을 키워야 한다. 완성된 형태만 고수하면, 어느 순간 낡아진다. 새로운 것이 투입되어 익숙한 것과 융합될 때, 예측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새로움이 출현한다. 무엇보다 극예술은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사람을 양성해야 현장은 생기가 넘친다. 그래서 사람을 모아야 할 공간과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딤프에서는 그런 자리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한 것이 연극인으로서 사뭇 부러웠다. 지역 공연생태계의 윤활유는 우리 안에서 찾을 때도 있지만, 울타리를 넓혀 누구든지 참여 가능토록 한다면 자연스럽게 사람에 의해 채워지고, 다시 비워질 수 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의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딤프 아카데미는 올해 10회를 맞는다. 차분하게 하나씩 밟아 온 계단이 벌써 9개나 되었다니. 일반인과 전문인을 가리지 않고, 뮤지컬을 사랑하는 꿈을 가진 청년에게 문을 열어놓으니, 그 결과도 하나 둘 출현하고 있다. 아카데미 출신의 수료자들의 몇몇 작품은 딤프 경연작이 되거나 개인이 제작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거창한 결과를 목표하는 건 아닐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음악과 연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깊은 기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정체성을 특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자기 이야기를 진솔하게 할 수 있고, 많은 이들에게 삶의 낙관을 던질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어떤 형태로던지 “그것 참 예술이다!” 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음악이 가진 힘은 인간에겐 가장 원초적인 동시에 시적이기에 우리는 더욱 극장을 찾는다. 뮤지컬은 음악을 활용해 인간을 노래하고, 사회를 비판하기도 하며, 자연의 숭고함 앞에서 우리는 겸허함을 갖는다. 그 중심엔 사람이 서 있고, 이런 다양한 물결 속에서 너울치는 멜로디와 배우의 땀, 관객의 박수가 극장을 메울 때, 뮤지컬이라는 아름다운 역사가 지속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