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셰이모어24

익숙한 것으로부터 멈출 때

by 이한

2018년 가을 즈음이었다.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지난 10여년간 숨 가쁘게 연극 작업에 매진해 온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잠시 멈춰야 할 시기가 왔다고 보았다.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내가 속한 단체의 직위도 후배에게 넘기고 나니 왠지 모를 흥분감이 들었다.

그 느낌은 이기적인 것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긍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여행을 앞둔 이가 캐리어를 싸는 기분 정도라면 말이 될까?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휴식처는 독일이었다.

연극을 할 당시 괴테나 보이체크, 뒤렌마트와 하이너 뮐러 같은

독일어권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나는 왜 그들의 글에 매력을 느꼈을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어리숙한 믿음이 독일행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비행장에 착륙하고 11시간 남짓 걸렸을 때,

기지개를 켜며 주위를 둘러볼 때 나지막이 혼자 주절거렸다.


"…이렇게 빨리."


결정할 때는 3년이 걸렸는데 도착은 불과 반나절이라니.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급하게 묵어야 할 곳에 짐을 풀고

바람이라도 쐬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공원을 찾았다.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나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꺼버렸다.


벤치가 눈에 보여 그곳으로 가 가만히 앉아 있기 시작했다.

주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

저편에서 들리는 강아지가 뛰어다니는 소리….


갑자기 대구에서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마 한국에서도 이 소리들은 언제나 나와 함께했을 텐데,

왜 나는 이곳까지 와서야 이 소리들을 만난 걸까?


한국에서의 10년은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바쁜 것보다 사람들 속에 치여 정확히 대상을 볼 수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씩 버려보자는 기대가

조용히 가슴 안에서 설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얼마를 지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있는 동안

모든 일은 처음 맞닥뜨리는 것들이리라.

한국에서 20대를 한 가지 일로 보내며 살아 얻은 경험과

30대의 내가 얻을 것들은 어떤 새로움으로 다가올까?


적어도 그것은 인간으로서

나의 존재가 원하는 원초적인 본능일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요한 폰 볼프강 괴테의 파우스트의 행위처럼 말이다.


인생은 나에게 주어진

질문의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닐까 고민해본다.

늘 그렇듯이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시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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