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그 거칠고도 눈부신 품에

인생의 가을에 만난 설악의 가을 : 2024년, 대청봉에 세 번 오르다

by 강희준

‘우리나라 공식 나이는 만 나이다.’

이 법이 공포된 때가 2023년 6월이라 한다.
법은 단순했지만, 사람 사이의 터울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2년 선배는 재작년에 칠순을 맞았다. 물론 거창한 잔치는 아니었고, 대여섯이 모여 밥 한 끼 나눈 게 전부였지만. 1년 빠른 친척 형은 작년이 칠순이었다.

내 생일은 1월 초순이라 해만 바뀌면 만 나이를 먹는다. 그러나 계산해 보면 1년 선배보다 생일을 두 해나 늦게 먹어야 맞다.


이게 법으로는 정리되었으되, 마음으로는 좀 헷갈린다. 아이들도 그런가 보다. 2024년 2월, 아들 내외가 베트남 여행표를 끊어왔다.
“아버지 칠순 여행이세요.”

만 나이로 하기로 했으니 아직 예순아홉인데, 친척들과 견주면 올해 가시는 게 맞단다.


이쯤 되니 숫자는 숫자일 뿐이었다.

그래, 나이 셈이 복잡한데 산에나 가자.
산은 내 나이를 묻지 않으니까.


2024년 10월 10일, 가을이 익어가는 설악으로 향했다. 설악산, 그중에서도 백담사에서 시작하는 길이었다. 수렴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초입은 정겨운 동네 뒷산처럼 따뜻했다.

완만한 경사, 계곡물소리,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은 가을 햇살. 발걸음은 가벼웠고, 마음도 한결 느슨해졌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봉정암으로 향하는 오르막은 단번에 분위기를 바꾸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종아리는 돌처럼 굳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왜 왔을까’라는 질문이 따라붙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적멸보궁이라 하니, 이쯤의 고단함은 일종의 통과의례였을까. 산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산사에서의 하룻밤은 고요했다.
별빛은 깊었고, 공기는 맑았다.

낮의 숨 가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튿날, 설악의 최고봉 대청봉(1,708m)에 섰다. 발아래 산맥은 파도처럼 굽이쳤고, 내가 걸어온 길은 가느다란 실선이 되어 있었다. 나이라는 숫자는 그 자리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이 두 발로 올라섰다는 사실만 남았다.


그러나 감동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소청봉을 지나 희운각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번 산행 중 가장 팽팽한 긴장을 안겼다.

깎아지른 듯한 내리막, 미끄러운 바위, 무릎 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압박. 설악은 여전히 만만하지 않았다. 갑자기 모글 스키 생각이 났다.


산은 나이를 배려하지 않는다. 이 코스는 다시 오지 말자. 하지만 시련 뒤에는 보상이 따르는 법이다. 천불동 계곡에 접어들자 공포는 이내 경탄으로 바뀌었다.


양옆으로 솟은 기암괴석, 비췻빛 소(沼),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할 절경의 연속.

‘설악의 꽃’이라 불리는 이유를 그제야 알 듯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나이를 잊었다.
그저 숨 쉬는 사람, 걷는 사람일 뿐이었다.

비선대를 지나 설악동 소공원으로 향하는 마지막 평지 길은 또 다른 시련이었다.

이미 몸은 천근만근. 끝이 보이지 않는 평지 길인데도 오히려 더 지루했다.

마침내 소공원에서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2024년, 나는 대청봉을 세 번 찾았다. 5월 말, 10월 초, 10월 하순. 누군가는 왜 그 고생을 사서 하느냐 묻는다. 그러나 백담의 온기, 봉정암의 적막, 대청의 위엄, 천불동의 비경을 온몸으로 겪어낸 이 여정은 내 삶의 지도에 굵은 선 하나를 그어주었다.


법은 나이를 만으로 계산하지만, 산은 나이를 고통과 숨으로 계산한다.

설악은 내게 겸손을 가르쳤고, 나는 그 거친 품 안에서 오히려 휴식을 배웠다.

칠순이든 예순아홉이든, 산은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서 있었고, 나는 묵묵히 올랐다.

그리고 내려왔다. 다시 오르기 위해.


**설악, 그 길 위에서**


소풍 같던 백담의 미소는

봉정암 오르는 숨 가쁨에 잊히고

대청봉 차가운 바람 끝에

세상은 발아래 굽이치네

희운각 내리막, 떨리는 무릎 세워

천불동 비경 속으로 저물면

비선대 지나 돌아오는 길

신선이 되었다가 다시 사람이 되는

그 황홀한 기운에 대하여.

https://youtu.be/WCb9tvl_X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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