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음 숙소에 캐리어를 맡기로 가는데, 갑작스레 비가 내려 급하게 우산을 구매했다.
"내일 한라산 가는데 비라니::"
사실 여행을 가기 전 주말부터 한라산에 눈이 많이 내렸다.
그래서 여행 가기 전날에도 부분통제였고, 내가 가는 당일에도 눈이 기다리고 있어
한라산 등반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캐리어를 숙소에 맡긴 후, 제주 터미널 주변에 '북카페 휴일'이라는 카페에 갔다.
원래는 미리 예약해야 하는 활동을 제외하고는 다 유동적으로 스케줄을 짜서
급하게 서칭하고 찾아간 카페이다..
책을 둘러보던 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전에 이 책을 한 번 도전해 본 적이 있다.
프로이트와 버지니아 울프 등 여러 작가들이 이 작품을 극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방대한 분량에 압도된 탓인지 1권조차 끝까지 읽지 못한 채 다시 반납하고 말았다.
모두가 독서를 하는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책을 읽다 시간이 지나고 해가 저물 때쯤 카페에서 나왔다.
숙소에 도착해서 일찍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는데.. 잠깐 일기 예보를 보았는데 내일 눈이 오지 않을 확률이 높아졌다. 그래서 기대감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에 대해 그렇게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게스트 하우스 특성상, 사람들 떠드는 소리와 여러 소음들이 너무 잘 들렸기에, 잠이 계속 깼고 결국엔 잠을 이루는 것을 포기했다.
밤을 지새우고 나니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숙소에서 제공한 미역국을 먹고
차를 타고 이동했다. 바깥 날씨를 보니 등반이 가능해 보였다.(기분이 매우 좋았음. 설렘)
한라산 입구에 도착하니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우비를 쓰고 입구를 통과해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 5시 20분이다 보니 어두 컴컴한 곳에서 홀로 뚜벅뚜벅 걸어갔는데,
이때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제일 힘든 코스인 '관음사'를 예약하고
등산 장비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채 간 것이, 지금 돌이켜 보면, 얼마나 무모했는지..
등반을 할 때는 단지 쳐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한 명 한 명을 제친다는 생각으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육체적으로는 꽤나 힘들었지만, 내가 정해둔 위치까지
쉬지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갔다.
쉴 새 없이 올라가니 내 시야에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눈도 소복이 쌓인 정경을 보면서
기분 좋게 올라갔다. 초 중반에는 내 앞-뒤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정말 나의 발자국 소리만 '푸석 푸석'만 들렸고 비도 그쳤기에 나 혼자만의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내가 중반부터는 앞에 해병대 전역하신 분들끼리 옷을 맞춰서 열정적으로 올라가고 있어 그 뒤를 따라가며 페이스를 유지했다. 만약 혼자 갔더라면 분명 쳐졌을 것이다.
눈이 계단을 덮을 정도로 많이 왔는데 밟으면 무릎 밑까지 들어간다. 그래서 앞에서 가신 분들이 밟았던
그 발자국을 따라가야 한다. 점점 올라갈수록 경사가 높아진다. 눈이 더 쌓여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기어서 올라갔다. 그런데 오히려 허리도 아프지 않고 좋았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 주변 경치가 너무 아름다우니 몸의 통증은 거의 잊었었다.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경상도에서 자란 나는 늘 설경을 고대해 왔기에, 그 순간이 더없이 황홀했다.
삼각봉 대피소(6~6.5km)에 도착해서 김밥 한 줄을 먹었다. 라면을 여기서 먹으면
노곤 해 질 것만 같아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까지 3km 정도 갔어야 했는데, 이때가 정말 고난 길이다. 경사는 너무 높고, 바람도 많이 분다..
이때 장난친다고 눈에서 3분 정도 누워있었는데, 장갑과 신발, 바지에 눈이 다 들어가서
하산할 때까지 몸속에 있는 눈들 때문에 고생 좀 했다.
쉬고 걸어가고, 쉬고 기어가고, 눈도 만지고 노래도 듣다 보니까 정상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백록담은 보지 못했지만, 눈보라도 덮인 정상의 풍경은 다른 의미로
낭만적이었다.
정상의 온도가 낮고 바람이 많이 불었기에 많이는 즐기지 못했고, 사진만 찍고 바로 하산했다.
내려가는 게 올라가는 것만큼 힘들었다. 내가 정상에 빨리 도착한 편이다 보니
내가 올라갔을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야 정상을 오르고 있었다.
내려가면서 지루하기도 했고, 내가 정상을 향했을 때의 고통을 알기에
거진 60명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던 것 같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파이팅!, 조심히 올라가세요!"
다들 고마워해서 뿌듯했다.
내려갈 때는 올라갔을 때 보지 못했던 주위 풍경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내려갔다.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또 달성했다. 물론 친구나, 가족끼리 함께 가도 재밌겠지만,
혼자 갔을 때의 그 경험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계속해서 여러 곳을 혼자 다녀볼 생각이다. 청소년기에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지냈던 내가
이제는 스스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집 밖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