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돋이 전, 동이 트면서 비치는 빛줄기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준다. 짙은 코발트블루가 점차 검붉은 주황색으로 바뀌면서 잠들어 있던 수평선이 깨어난다. 하늘은 서서히 밝아지고, 구름이나 공기 중 작은 입자들로 인해 산란하는 빛은 고요하게 주변을 물들인다.
경주 단용굴은 몇 번이나 출사를 간 곳이다. 주변의 기암괴석과 해송들이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울산과 경주의 경계에 있는 주상절리도 마찬가지다. 이 두 곳에서는 썰물 때와 해 뜨는 시간이 잘 맞아야 한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바위의 섬세한 부분을 담을 수 없다.
해가 뜰 때는 조리개를 조여야 한다. 이 시간엔 주변 조도가 급격하게 증가하므로 최대한 적은 양의 빛을 촬영 센서로 통과시켜야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촬영하려는 효과나 상황에 따라서 조리개를 넓히는 때도 있다. 동살은 태양이 자신의 조리개를 최소한으로 열 때이다. 아주 미세한 노출로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조심스럽게 주변의 사물을 살피면서 빛을 내보내는 일에 신중을 더한다. 그럴 때 풀, 꽃, 나무들은 간밤의 실루엣을 벗어버리고 그 형체를 드러낸다. 비로소 사물들의 이름이 완성되는 이때를 놓칠세라 많은 작가가 카메라에 담는다.
동살이 조리개를 열어 사물을 비추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적절한 노출이 필요하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방과 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물음이라 자존심 강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날 이후로 냉담해진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귀를 열지 않았다. 나의 조리개는 친구의 그것보다 노출이 적었던 모양이었다.
입사 동기가 있었다. 동갑에다 동향이라 취미생활도 같이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주변에서 형제라고 할 정도로 마음을 다해 사소한 것 하나라도 빠짐없이 챙겼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을 어린애 취급한다면서 일방적으로 절연하고 떠나버렸다.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조리개를 너무 많이 열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빛의 양을 조절하여 사진의 밝기와 초점을 조절하는 것처럼 마음도 다양한 상황에 따라 열거나 닫을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이 개방하거나 반대로 적게 노출하게 되면 내가 다치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하면서 적절한 긴장을 놓지 않는 것이 좋은 관계를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나는 해돋이 사진을 좋아한다. 수평선 위로 반쯤 떠 오른 해가 하늘과 바다를 물들일 때는 마치 천지창조가 저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단순한 일의 반복을 뭐 하려 하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살의 감동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가끔씩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혹시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서이다. 잠시 분주함을 내려놓고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침잠의 시간은 현대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해돋이 사진을 찍는 이때면 나도 평야에 우뚝 선 인디언이 된다.
나를 오롯이 나이게 하는 지금이 좋다. 마음의 폐허에서 새로운 믿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살의 빛 사이로 흐릿한 피사체 하나가 잡힌다. 이때다. 심호흡을 안 뒤, 숨을 멈추고 셔터를 누른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