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시부야, 라무네색 청춘
여름의 보편적인 인상이라 함은 찌는 듯한 더위와 피서 혹은 물놀이 정도겠으나, 왜인지 나는 여름을 떠올리면 장마와 습기만이 있다. 물기의 계절 - 그러나 마를 조짐이 보이지 않는 짙은 물기의 계절. 흐린 여름날 오후와 밤의 사이는 마치 영원할 듯 보이기도 한다.
여름의 어스름은 유독 차갑다. 고가도로를 달리는 승용차들의 전조등으로도 데워지지 않을 만큼. 밤의 한강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전철에 탄다. 세상 분의 n만큼의 사연들이 강남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전철이 한강 중심을 지날 때면 꼭 새로운 마음을 먹기로 했으나, 나는 이번에도 악습들을 품에 안은 채로 내렸다. 이런...
두근두근. 작위적이지 않은 심장박동을 마지막으로 느낀 때가 언제였나를 생각한다. 보랏빛 하늘을 보았을 때나 내리는 비를 흠뻑 맞았을 때, 뒤꿈치가 까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결국 없었나. 삶에 거는 기대가 없기 때문인가도 싶다. 종이비행기를 날릴 때마저도 멀리 날아가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떨림이 없는 일상은 밤잠을 설친 다음날만 같다. 잠시 꾼 일상의 변칙은 눈을 뜨는 순간 맥아리 없이 바스라진다. 희뿌연 안개처럼, 환풍기로 빨려 들어가는 담배연기처럼 나른한 모양으로. 정오 즈음엔 느낌마저 옅어져 눈을 비비고 봐도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간직하려 애를 써도 기억될 수 없는 단꿈이 야속하다.
잠들 수 없는 밤과 현재감 없이 흘러가는 하루들의 총합이 커져만 간다. 미안합니다-용서해주세요-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식의 명상법이 하와이로부터 발생했다고 한다. 무턱대고 따라 해 본다. 적지 않게 마음을 가다듬고 나면 기척도 없이 잠에 든다. 무대 효과처럼 꿈들이 번진다. 꿈들이 수증기를 닮았다.
입김에도 사라진다.
오늘은 여행을 가는 꿈을 꾸었다. 나는 야경이 프린팅 된 면 티셔츠를 입었고, 나리타행 티켓을 손에 쥐고 있다. 도쿄, 시부야, 라무네색 청춘 등등이 적힌 작가노트도 품에 있다. 야간 버스가 밤을 지나 먼 북해도에 도착할 즈음엔 꼭 악습들을 버리고 와야지. 아침이 되어 흐려져도 꼭 잊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