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명헌] 흐린 기억 속의 그대

[케이팝 명반 헌터스] 3. 현진영 'New Dance2'

by 간지훈

K-Pop이 태어난 날을 서태지와 아이들의 ‘특종! TV연예’ 출연인 1992년 4월 11일로 정하고 있지만, 현재 K-Pop의 주류인 아이돌 그룹, 특히 보이 그룹의 시초는 H.O.T.의 데뷔로 봄이 마땅하다. K-Pop을 대표하는 3대 혹은 4대 기획사를 꼽을 때 항상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이름 그 SM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H.O.T.가 데뷔하기 이미 6년 전 SM엔터테인먼트가 배출해 K-Pop 최초의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한 남자의 이름은 현재의 K-Pop팬들에게는 SM프로덕션이나 SM기획 같은 예전의 잊혀진 이름 만큼이나 낯설고 생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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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이전에 현진영이 있었다


서울대 출신의 포크 가수로 1970년대 두어 개의 히트곡을 배출했고, 가수 이상으로 MC로서 인기를 얻으며 엘리트적 이미지로 ‘대학가요제’의 진행을 도맡았던 이수만은 1981년 NASA가 설립한 플로리다공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운명적이게도 이수만이 유학을 떠난 그 해는 MTV가 개국하여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막 도래하던 시점이었다. 전공 공부보다 되려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에이전시에 대한 비전에 눈을 돌린 이수만은 1985년 귀국하여 70년대 후반의 포크와는 딴판인 ‘New Age Music’이란 디스코풍의 테크노 음악을 들고 나왔다.


1989년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딴 SM을 내걸고 기획사를 차려 ‘New Age Music2’까지 내놓았지만 ‘마(馬)상 혹은 마삼 트리오’로 묶인 다른 두 방송인 겸 가수 이문세와 유열이 가수로도 승승장구한 것과 달리 MBC ‘이야기쇼 만남’의 진행자 등 방송인의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결국 가수 활동을 접고 온전히 프로듀서의 길을 걷기로 한 이수만은 자신이 들여온 전자 음악을 충실히 구현할 이태원에서 가장 뛰어난 춤꾼을 포착해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1990년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바로 그 남자, 현진영이었다.


재즈피아니스트 허병찬의 아들인 현진영(본명 허현석)은 한남동 유엔빌리지 근처에서 아버지와 달리 재즈가 아닌 흑인 친구들과 댄스 배틀을 벌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 미국 본토의 비보잉 기술들을 완성된 수준으로 구사했다고 하며 14살에 한국 1세대 비보이팀 스파크에 스카우트될 정도로 타고난 춤꾼이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춤꾼 중 한 명인 클론의 구준엽은 JTBC ‘아는 형님’에서 “내 눈으로 11바퀴 턴을 돈 사람을 처음 봤다”면서 당대 최고의 댄서로 현진영을 꼽았을 정도다.


SM의 1호 프로듀서인 홍종화는 자넷 잭슨을 레퍼런스 삼아 일본 아이돌 댄스 분위기에 머물던 1980년대의 소방차, 박남정 등의 댄스 음악과 차별화를 두는 ‘블랙 뮤직’의 아우라를 심기로 했다. 여기에 이수만은 당대의 스타였던 바비 브라운의 이른바 ‘토끼춤’을 구사할 댄서들을 뽑아 현진영의 뒤에 배치했다. 현진영의 솔로 1집이지만 ‘현진영과 와와’라는 이름으로 탄생했고 와와는 6년 뒤 클론으로 가요계를 흔들어놓는 구준엽과 강원래였다.


현진영 1집 ‘New Dance’는 힙합을 기반으로 한 뉴잭스윙 ‘야한 여자’를 타이틀로 했지만 2년 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와 같은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후속곡 ‘슬픈 마네킹’이 히트했고 80년대의 ‘뽕끼’를 걷어낸 새로운 댄스 뮤직은 현진영을 ‘선구자’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1991년 부산 공연 중 현진영이 대마초 상습 흡연으로 구속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현진영과 와와는 그대로 와해되고 말았다.


흐려져 버린 기억 속의 그대


현진영이 재기를 도모할 무렵 세상은 자신이 꿈꿨던 랩 댄스 뮤직으로 천하를 통일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독무대였다. 2년 전 내놓은 솔로 1집의 후속작을 천명하듯 ‘New Dance2’를 타이틀로 한 현진영의 2집은 이탁이 만든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난 알아요’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두면서 보기 좋게 권토중래에 성공한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듯한 재지한 피아노의 세련된 멜로디 위에 동시대의 미국 힙합을 이식시켜 뉴잭스윙, 힙하우스 등 첨단의 사운드가 얹혀졌고 현진영의 진일보한 보컬과 랩이 토끼춤이 아닌 ‘엉거주춤’으로 발현된 결과물이었다.


현진영의 대마초 사건으로 와해 직전까지 갔던 SM도 보란 듯이 일어섰고 이제 2라운드를 앞두게 됐다. 운명의 1993년 초여름에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은 ‘난 알아요’를 훌쩍 넘어선 ‘하여가’로 충격과 공포를 불러오며 ‘소포모어 징크스’ 따윈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버린 상태였다. ‘하여가’의 충격파가 가시던 초가을 현진영은 ‘Int.World Beat And Hiphop Of New Dance3’라는 요란하지만 그만큼 자신감 넘치는 3집을 들고 돌아온다. 스포츠 신문에서는 연일 ‘서태지와 현진영의 진검승부’라고 분위기를 띄웠고 ‘New Dance3’는 선주문만 100만장이라는 보도가 나올 만큼 당대 가요계, 특히 10대들의 우상이 누구인지 가리게 될 최종장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1993년 11월 14일 서울 송파경찰서가 필로폰 투약 혐의로 현진영을 구속하면서 진검승부는 칼을 빼 보지도 못하고 끝났다. 서태지는 이듬해 발표하는 3집을 통해 ‘문화 대통령’에 등극했지만 현진영은 자신의 노래 제목 따라간다는 대중음악계의 속설처럼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사라졌다.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작사, 작곡하고 구준엽과 탁2준2로 활동하던 ‘약쟁이 동지’ 이탁과 1998년 I.W.B.H를 결성해 컴백했지만 이미 시대는 H.O.T.를 대표로 하는 10대 아이돌 그룹으로 균형추가 넘어갔고 현진영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경찰 조사와 압수 수색으로 풍비박산이 난 SM은 도산 위기까지 몰렸고 매니저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현진영 발굴의 주역인 홍종화마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위기에 빠진 이수만이 꺼내든 카드는 이태원 클럽에서 약을 하는지, 뽕을 하는지 모를 양아치를 발탁하는 것이 아니라 모닝구 무스메처럼 기업형으로 육성하는 일본형 아이돌의 연습생 제도였다. 그리고 그 최초의 결과물은 현진영의 추락 이후 단 3년 만에 이수만의 혜안이 완전히 옳았음을 명징하게 증명해 주었다.


현진영 ‘New Dance2’(1992)


1. Intro


2. 흐린 기억속의 그대 (Club Mix)


3. 너에게만


4. 너는 왜 (현진영 Go 진영 Go)


5. 봄비


6. 한동안 뜸했었지


7. 미인


8. 비틀거리는 세상 (Remix)


9. 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


10. 떠나가지마


11. 흐린 기억속의 그대 (Original)


12. 흐린 기억속의 그대 (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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