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n번째 이직의 서막 — 깊은 터널로 들어서다

인생은 미완성. 날 찾아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오케이

by 심취한홍보맨

그렇게 구두 제조회사를 벅차고 나간 나는

며칠 뒤 상장사로 이직을 단행한다.


강남 역삼동의 아침 공기는 유난히 묘한 향을 풍겼다.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명확하게 느꼈다.


“꿈과 욕망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로비는 천장이 높았고,
커다란 샹들리에가 유난히 빛났다.
바닥은 대리석이었고,
초고층 빌딩 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감에 찬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2년 반 동안 매일같이 지옥 같았던 Medicom에서
겨우 빠져나와
비상장사에서 처음 빛을 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세계를 제대로 만들고 싶었던 남자였다.

출근 첫날,
회사에서 새로 뜯은 노트북을 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고
업무용 휴대폰도 최신 기종으로 지급되었다.
책상은 넓었고
의자는 무겁고 고급스러웠다.
개인 캐비닛까지 완비됐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화려한 겉면

이 회사의 대표는 서른 중반의 젊은 한국인이었다.
중국 유학파 출신이자
중국계 최대주주의 지원을 받아
국내에서 게임사를 상장시킨 인물이었다.

출근 첫날,
회사의 지하주차장에서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조용히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았다.
운전기사가 도어를 열어주고
대표는 태연하게 차에 올라탔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여긴 정말 다른 세계다”


회사는 선택근무제를 운영했고,
나는 10시에 출근했다.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여유롭게 사무실을 들어왔고
누군가는 소파에 기대어 화상 미팅을 하고 있었다.
00커뮤니케이션 시절 새벽같이 출근해
9시 전부터 긴장 상태로 초벌 기사 쓰던 나에게는
완전히 낯선 풍경이었다.


IR이라는 새로운 전장

내 담당 업무는
언론 대응과 기업 공시 실무를 병행하는 IR/PR 하이브리드 포지션이었다.
언론사와 기자들을 상대하는 일은 익숙했지만
공시는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단어들이 쏟아졌다.
주가, 공시, CB, BW, 지분율, 외부감사, 의결권, 딜 클로징, MOU, SPA.

나는 늦은 밤까지
DART를 들여다보며 용어를 외웠다.
아내는 옆에서 아들 ‘소망’을 재우며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책임이 커진다는 건 언제나 두려움과 함께 왔다.


벼락처럼 떨어진 소식

입사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대표가 내 자리로 걸어왔다.


“부산으로 내려갑니다. 임시주총 준비하세요.
6성급 호텔 컨퍼런스룸으로”


부산?
6성급 호텔?
임시주총?

나는 놀랐지만,
곧 회사가 움직이는 규모를 실감했다.
출장은 SRT 일등석,
호텔 컨퍼런스홀은 화려했고
모든 일은 매끄럽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날 오후,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세상이 뒤집혔다.

내 휴대폰에 속보 알림이 떴다.


“○○게임즈, 사우디 빈살만 왕세자 재단에 매각”


나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인터넷 기사들이 초 단위로 복사되듯 생성되었고
내 휴대폰은 쉼 없이 진동했다.


“홍보실 맞습니까?”
“입장 전달해주세요”
“사실입니까?”
“주가 전망은?”


열차 창밖으로 풍경이 흐르는데
머릿속에서는 하얀 소음만이 울렸다.

4일 동안 회사의 주가는
매일 상한가를 기록했다.
동료 직원들은 환호했고
투자자 커뮤니티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벌어졌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이 회사의 주식을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대표와 임원들은 스톡옵션으로 수십억 원의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사가 쏟아졌다.
나는 그동안 그 보도자료를 직접 작성하고 배포했었다.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붕괴의 시작

딜이 최종 종결되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세상은 코로나19라는 검은 파도에 잠겼고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었다.

아내는 돌 지난 아들을 품에 안고
웃다가 울기도 했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회사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대표는 출근하지 않았고
언론 대응은 지옥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진 상장폐지” 공시가 올라왔다.

그 순간 내 자리는 사라졌다.


더 이상 홍보도, IR도 필요 없다는 통보.
내가 들고 있던 노트북이
단숨에 의미 없는 철덩어리가 되었다.

나는 또다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결혼식 청첩장이 집 앞 신발장 위로 쌓여갔다.
축의금조차 부담스러웠다.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다섯 번째 직장으로 향하는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아니 어쩌면 빨려 들어간걸 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이 고되고 힘들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때부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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