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고서야 봄인줄 깨닫다
OO커뮤니케이션에서의 2년 반이 내 삶의 가장 어두운 터널이었다면,
인생 첫 이직으로 옮긴 회사는 내 삶에서 가장 빛나던 곳이었다.
매일 울며 버텼고, 매일 무너졌던 홍보대행사.
그 터널 끝에서 잡은 비상장사 홍보실의 기회는
내게 처음으로 숨을 쉴 수 있는 작은 창문이었고,
내가 살아있음을,
나라는 사람도 어디선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다.
이직 후 입사 첫날, 회사 로비에 걸린 오래된 흑백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1954년, 전쟁 직후 아무것도 없던 그 시절 대한민국.
맨손으로 구두 한 켤레를 만들던 장인들의 모습.
흙먼지 가득한 작업장,
기름 때 묻은 앞치마,
그 아래 적힌 문구.
“불량율 0%를 위하여... 수출의 탑 1만불 달성”
나는 그 문장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와.. 내가 중학교 입학 때나 신어보던 이 회사 구두를
내가 직접 홍보하게 되다니... 여기서 다시 새로 태어나자”고.
입사 3일째 아침,
회사 전체가 술렁였다.
경제지 1면에 부정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일본 제화업체가 제기한 상표권 소송.
대표이사는 말없이 신문을 접더니 말했다.
“홍보실 담당자 누구지? 이거 돈주면 내려주나?”
사무실 밖에서 나즈막히 들리는 임원진들의 회의 소리.
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게 나의 첫 전장이라는 걸 직감했다.
때마침 자리로 전화가 걸려온다.
"어 자네 새로온 홍보담당자인가?
우리 회사 과거 기사들좀 쭉 찾아볼래?
이거 상표권 문제 말이야... 이게 아니거든?"
그렇게 나는 몇날 며칠을 밤새우며
회사 사료를 뒤졌다.
그리고 우리회사가 선임한 변호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리소스를 최대한으로 뽑아냈다.
며칠 뒤,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날 아침 공기는 이상할 만큼 차가웠다.
겨울도 아닌데..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긴장과 싸늘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핀으로 고정한 네이비 타이 위에
구두약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올라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
법무실장과 변호사가 나타났고,
우리는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차 안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여러 번 머릿속으로 브리핑 멘트를 반복했다.
“상표 사용의 역사적 맥락과 정당성…”
“소비자 혼동 가능성 없음…”
“국내 산업 발전의 상징으로서의 가치…”
법원 앞 인도에 내렸을 때,
플래시가 번쩍였다.
사회부 기자들, 유통부 기자들, 카메라, 마이크,
언론사 로고가 붙은 마이크들이 앞다투며 다가왔다.
심장이 목까지 차오르는데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만큼 고요하고 선명했다.
내가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입장 말씀 부탁드립니다”
명함 한 장도 제대로 내밀지 못하던 내가
수십 명의 기자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당사는 상표권 사용의 역사성과 정당성을 명확히 입증할 것입니다.
소비자 피해는 없으며, 이번 소송은 산업 발전을 향한 우리의 노력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판단합니다”
내 목소리가
법원 계단 위에 울렸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날 밤,
뉴스 헤드라인에 내 멘트가 그대로 실렸다.
상표권 소송에서 승소한 것보다
우리나라 기업이 일본 기업에게 이겼다는 소식.
이게 야마(일본 비속어, '주제')였다.
다음 날 오전 대표이사는 조용히 나를 불러 말했다.
“수고했네”
그 짧은 네 글자는 입사 한지 고작 얼마 되지 않은
나라는 사람의 회사생활을 더욱 값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지는 업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몇 주 후,
나는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첫 행사 기획을 맡았다.
예산은 넉넉지 않았고
직원도 없었다.
나를 뽑았던 막내도,
처음 입사했을 때 있던 팀장도,
모두 이직하거나 정리해고 됐다.
구두 산업이 꺾이면서 회사도 성숙기에 들어갔기에,
홍보마케팅실 인원 감축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환경은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1인 홍보실.
행사 당일,
나는 행사장 바닥의 먼지를 직접 닦았다.
언론사 명단을 손으로 다시 확인하고
마이크 테스트를 반복하고
좌석의 간격까지 직접 조정했다.
내가 기획한 행사는 강남 한복판에서 패션쇼를 여는 것이었다.
미스코리아 진선미 모델들을 섭외했고,
우리회사 신상품들을 하나씩 입혔다.
행사가 시작되고
기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부르며 악수를 청하는 기자가 있었다.
“요즘 고생 많으시죠?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OO커뮤니케이션 시절,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대표이사와 임원진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건물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주변 모든 직원들도 새로 입사한 경력직 신입 홍보담당자인 나를
치켜세우는 듯한 말들이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홍보실 새로 들어온 친구 진짜 일 잘하네”
그 말들이 진실이던 아니던, 내 귀 듣는 순간
가슴이 뜨겁게 차올랐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느꼈다.
매일 아침 출근 길이 즐거웠고
출근카드를 찍을 때의 소리가
승리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실제 특진도 했다. 경력 사원으로 입사했지만
회사 내규에 맞추면 사원이었다.
대리로 승진하자 급여도 올랐고,
내가 업무에 필요한 경비까지 생겼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젠 할 수 있다. 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은 위에 오르면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지기 마련.
나 역시 그랬다.
1인 홍보실,
언론 행사,
브리핑,
PPL,
대표 직보 업무.
나는 어느새
기업 홍보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생각했다.
“이제 상장사에서 IR을 해보고 싶은데..? 내 실력을 진짜 확인하려면 더 큰 곳으로 가야하는데...”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고자 이력서를 새로 꺼내 고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선택했다.
먼 훗날.. 그 선택이 내 인생을 가장 거센 폭풍 속으로 밀어 넣을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만약 알았더라면 난 그냥 평범한 직장인으로, 아니 어쩌면 이직 횟수가 만 11년 차에
고작 두 번만 있을... 그런 직장인으로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선택은 곧 책임이라지만 내게 너무 가혹했다. 내 스스로 몰랐다.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내가 택한 책임은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는 칼날이 돼 돌아왔다.
내가 사직서를 준비하고서 상무님을 찾아뵙자 내게 딱 한마디 하셨다.
"너 여기 나가면 후회할텐데.. 못돌아와. 다시 생각해봐"
그런 상무님의 말에 고작 젊음과 패기로만 뭉쳐있던 나는 담대히 받아쳤다.
"아니오, 다시 돌아올 일은 없지만 제가 더 큰 기업 홍보를 담당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