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에이전시는 기피하는 구나
폐기물 처리업체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사무실 창밖으로 조용히 떨어지는 눈을 보며 다짐했다.
“이번엔 좀 다를 거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던 지난 회사와 달리,
다음으로 향할 곳은 국내 최고 수준의 홍보대행사였다.
누구나 인정하는 1티어.
수많은 브랜드가 문을 두드리는 곳.
게다가 나는 그곳에서 팀장으로 출근하는 사람이었다.
아침 공기는 차갑고 날카로웠지만,
새로운 시작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며 팀 구성을 살펴봤다.
나, 팀장(차장) 여자 과장 1명
여자 대리 2명
남자 대리 1명
여자 사원 2명
겉보기엔 균형 잡힌 구성.
하지만 불과 몇 시간 만에 느꼈다.
이 팀의 중심은 나가 아니라,
여자 과장이었다.
그녀는 은근한 카리스마로 팀 전체를 조용히 쥐고 흔들었다.
명확한 지시도 없이 분위기만으로 흐름을 조정하는 사람.
팀원들은 그녀가 고개만 들어도 반응했다.
내가 누군가를 부를 때면
그들은 본능적으로 과장을 먼저 바라봤다.
“과장님, 팀장님이 부르시는데…” “응, 다녀와”
그 허락이 없으면
그 누구도 나에게 오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팀에 ‘팀장’은 이미 따로 있었던 것이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연스럽게 점심을 제안했다.
“오늘은 다 같이 식사할까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과장이 말했다.
“전 바빠서 못 가요”
그러자 나머지 팀원들이
마치 숨겨진 신호를 받은 듯
일제히 말을 덧붙였다.
“아… 저도 오늘은…”, “저도 약속이 있어서…”, “저도 다음에…”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텅 빈 회의실에서
나는 말없이 물컵을 들어 올렸다.
입안에 닿는 물맛이
괜히 쓸쓸했다.
그날 오후,
내 마음 속에 아주 작은 금이 하나 생겼다.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었지만
결국에는 큰 균열이 될 금이었다.
회의를 하면
팀원들은 서로의 말에 반응하고 웃고 공감했다.
단, 나만 빼고.
그들은 내가 옆에 있어도
영화 얘기, 맛집 얘기, 연예인 얘기를 나누었다.
내 쪽으로는 단 한 번도 질문이나 호기심의 시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어느 순간,
내가 회의실 한쪽 벽의 포스터처럼
장식품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조용히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도 업무로 보여주면 되지”
그래서 나는 실력으로 승부하기로 했다.
고객사 미팅에 가면
내가 주도적으로 브리핑을 했다.
기자 연락 역시 매끄럽게 이어갔다.
고객사 담당자는 호감과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전 팀장님, 확실히 다르네요.”
그리고 이 회사에서 단 3개월을 일하다 나온 뒤
내가 맡았던 고객사 두 곳이 바로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대행사는 놀랐고,
내 가치를 뒤늦게 실감했다.
하지만
그 가치는 오직 대행사 ‘밖’에서만 유효했다.
팀 내부에서의 나는
여전히 투명했고,
존재감 없는 그림자였다.
어느 날 회의 중이었다.
아이데이션 단계라
각자 의견을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자 대리 둘이
과장과 함께 내 농담에 반응도 안 하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로의 의견만 이어갔다.
그들의 대화는 이렇게 흘렀다.
“어제 그 영화 봤어?”
“헐! 나도!”
“○○카페도 갔다왔어.”
“대박—연예인 많이 오던데?”
나는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가 내 앞에서도 울렸지만
나는 그들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 순간의 공기는
지난 에피소드의 배경인 이전 회사에서 느꼈던 배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정이었다.
거기는 적대였고,
여기는 무관심이라는 이름의 소멸이었다.
내가 제시하는 방향성은
과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묵살됐다.
업무적인 의견 충돌이 생기면
팀원들은 내게 건너뛰고
바로 임원실로 향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학생이 담임에게 혼날 일이 생기면
바로 교장실로 뛰어가는 장면과 비슷했다.
임원들도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중심입니다”, “여러분 의견이 제일 중요해요”
나에게는 힘이 없었다.
혹은,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마침 우리 집 근처에서
상장사 홍보실 경력직 채용공고가 떴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 챕터6에서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출퇴근만 1시간 반씩 걸리고,
팀원들은 팀장을 인정하지 않고,
업무 문화는 세대 간 거대한 단절로 갈라져 있고,
임원들은 갈등을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누구라도 떠날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지원했다.
그리고 합격했다.
퇴사 통보를 하자
과장도, 팀원도, 임원도
모두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래, 네가 떠난다고 해서 우리한테 달라질 건 없지”
나도 속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내가 떠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