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다시 상장사, 그러나 마음은 쉬지 못했다

내게 맞는 회사는 있을까?

by 심취한홍보맨

다시 상장사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익숙한 공기가 밀려왔다.
번쩍이지는 않지만 정돈된 로비,
말수가 적고 표정이 평온한 사람들.

이번 회사는 집에서 가까웠다.
아침 출근길에 숨이 가쁘지 않았고,
퇴근 후에도 아이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회사 이름은 유명하지 않았지만,
재무 상태는 견실했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표정에 절박함이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짧고 굵게’가 아니라
‘가늘고 길게’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큰 욕심 없이, 큰 사고 없이,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이어가는 분위기.

대표이사와 임원들은 정중했다.
말끝이 늘 부드러웠고,
회의가 끝나면 먼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이 형식이 아니라는 걸
나는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 보면, 완벽한 자리였다.


문제는, 나를 뽑은 ‘그 임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직접 면접 보고,
이 회사로 불러들인 임원은
이 조직에서 가장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정치권 출신.

말은 유려했고,
사람을 만나는 데는 능숙했다.
전화 한 통이면 연결되는 인맥이 많았고,
이름만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실무는 없었다.


이 회사의 다른 임원들이
모두 실무형이라는 점이
오히려 대비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질문을 받으면
여러 가능성을 놓고 고민했고,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공유했다.


반면,

내 위에 있는 그 임원은
언제나 애매한 말만 남겼다.

“이건 아직 아닌 것 같고…”, “조금 더 지켜보죠.”, “괜히 움직였다가 오해 살 수 있어요.”


나는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경력직으로 들어왔다면
성과를 내고, 역할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작 내 상사는
아무것도 하라고 하지 않았다.


보고를 막는 상사

어느 날이었다.
대외적으로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사안이 있어
보고를 준비했다.
자료도 정리했고,
리스크도 나름대로 분석해두었다.

하지만 보고를 올리려는 순간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직 확정도 안 된 걸 왜 벌써부터 움직여?” “회장님 귀에 들어갔다가 괜히 혼날 수도 있어.”


그 말은 명확했다.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늘 회장님의 눈치를 봤다.
무언가를 제안하기보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 앞에서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외부 미팅, 그리고 반복되는 불쾌감

문제는 외부 미팅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내 업무 특성상
외부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가 잦았고
그는 종종 동석했다.


그런데 미팅의 방향은
자주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저렴하고 저급한 농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
상대의 반응을 살피기보다
자기 말만 이어가는 태도.

나는 테이블 맞은편 사람의
미묘하게 굳어가는 표정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속으로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이게 과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자리일까.’

미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늘 허탈했다.
성과도 없고,
관계도 남지 않았다.


그저 사람을 소비하고 돌아오는 느낌.

점점 커지는 간극

그 임원은 회사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여긴 텃세가 심해” “정보를 너무 안 줘”, “우리 같은 외부 출신은 항상 조심해야 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 회사의 사람들은
분명히 성실했고,
조심스럽지만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왜
이 임원만 이렇게 느끼는 걸까.

아니면, 그가 그렇게 느끼고 싶어 하는 걸까.


안정 속의 불안

나는 지금도 이 회사에 다니고 있다.
급여는 안정적이고,
출퇴근은 편하고,
사람들도 대체로 무난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같은 감정이 남아 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
아니,
언제든 떠나고 싶다는 욕구.

일을 더 잘하고 싶은데
막혀 있는 느낌.

움직이고 싶은데
손발이 묶여 있는 느낌.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나는 또 이직해야 하나?

이상하게도
이제는 그 감정이 낯설지 않다.
불안, 갈등, 이직 욕구.
모두 익숙하다.

나는 안다.
이 감정이 언젠가는
또 하나의 선택으로 이어질 거라는 걸.


아직 이 회사와 내가 서로를 더 알아갈 것들이 많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신중하게
이 곳에서 새로운 걸 또 발견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매일 묻는다.

“한번 더 ?… 아니면 더 버텨?” 매일 같은 고민의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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