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후가
고요한 결심(이화열 지음)
부제는 ‘내 삶의 언어로 존엄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이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존엄에 대해서 말하는 책이다. 작가님은 <서재 이혼 시키기> <지지 않는 하루> 등을 쓴 에세이 작가이고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시어머니 아를레트와 편안한 습관처럼 30년을 지냈고, 어느날 어머님은 조력사를 원하고 작가님이 그 옆을 지키면서 죽음과 늙음에 대해서 사유한 철학에세이 이다. 작가님은 시어머니와 평어로 대화하는데 존댓말을 쓰지 않고 평어로 표현한 부분이 그들 관계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안락사는 의사의 손을 빌려 죽음에 이르는 것이고, 조력사는 의사의 도움을 받지만 스스로 마지막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다. 프랑스에는 안락사와 조력사 둘 다 혀용되지 않아서 스위스에서 조력사를 하기로 신청한다. 조력사 비용은 만유로(협회 수수료, 행정비, 화장비 포함)이다. 한국돈으로 1유로가 1674원이니 1600만원 정도가 드는 셈이다. 너무 가난한 사람은 조력사나 안락사도 선택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의 안락사는 스위스에 비해 까다롭다고 한다. 전화로 마지막 결심을 확인하는 인터뷰장면이 등장한다 .스위스에서는 환자 내면의 고통도 죽음에 이르는 ‘충분한 이유’로 간주한다고 하는데, 충분한 이유는 어떤 기준일까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내면의 고통은 워낙 주관적일수 밖에 없는데, 어떤 근거로 그 고통의 크기를 확인하는 것일까하는 궁금함.
<서재 이혼 시키기>에 보면 작가님은 철학책을 자주 읽는 편이라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죽음과 늙음에 대한 사유가 깊고 단단하다. 그리고 문장들도 담백하다. 그 담백한 문장을 내기까지 평소에 얼마나 그 주제에 대해 생각했을지 상상해본다.
아를레트는 낙상사고후 등이 점점 굽었고, 황반변성으로 시력이 흐려졌다. 내향적인 성격에 가족을 챙기는 일이 전부였고 유일한 취미가 독서였는데, 그 독서의 즐거움을 잃는 기분이 어떨까. 그래서 오디오 북을 종일 틀어 놓으신다. 걷는게 버거워서 거의 집에만 있고, 눕고 일어나려면 도움없이는 불편해 종일 의자에만 앉아 있고, 듣는 건 희미하고, 보이는 건 어둠일때 혼자 있는 집에서 느끼는 그 적막감과 고립감은 어떨까. 그 밤은 얼마나 길까. 하루는 한 달 같고, 밤은 너무나도 길고, 새벽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질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어른들이 자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이 오래 살아온 집에서 머물길 원하는 이유는 뭘까. 그녀에게 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삶은 아직 자신이 결정한다는 감각이 허락되는 공간이다. 식탁위에 무엇을 놓을지, 커튼을 열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곳. 그 일상의 사소한 결정들이 ‘나는 아직 삶의 주인이다’라는 감각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작가님과 시어머니 아를레트는 목요일마다 샴페인을 마시는 시간을 가진다. 그녀가 가질수 있는 몇 안되는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 같다. 아를레트의 딸 안느는 어린시절 아를레트가 아들 올비를 더 편애했다고 생각한다.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안느가 미워보이는 장면이 종종 있었는데, 안느의 입장에서는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은 든다. 조력사 직전, 아를레트는 손자들과 통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안느는 알았다고 해놓고 할머니를 찾는 자신의 자녀들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에게 손자들 전화를 바꿔준다. 마지막 가는순간에도 어머니 마음의 평온보다 자녀들을 달래는 일이 더 중요한 안느가 안타까웠다. 남편 올비의 무해하고 중립적인 태도가 결국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안느라는 존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를 해왔다는 점에 동의한다.
나의 어머니도 외할머니에 대한 분노가 미해결 과제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환청이 들리고 혼잣말을 해서 정신과 약을 복용하길 원했지만, 할머니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약을 드시지 않았다. 그모습에 화가 난 엄마는 6개월정도 할머니집을 방문도 하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은 적이 있다. 매번 만나면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친척들에 대해 욕을 퍼붓는 모습이 엄마는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할머니가 엄마집에 가면 엄마는 자기 방안에 들어가서 앓아 눕는다. 여동생(엄마와 둘이 산다)은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때론 무섭고 공황이 올 것 같았다고 최근에 나에게 말해주었다. 동생이 어린시절 그 둘 사이에서 경험한 감정이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나는 그때 우울증으로 내방에만 누워 있었으니 동생은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엄마의 미해결 문제를 왜 여동생이 중간에서 감당해야하는지 좀 속상해서 엄마에게 다시 상담을 받으며 외할머니(엄마에게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어린시절의 분노에 대해서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야하는게 아니냐며 지나가는 말로 던진 적이 있다. 할머니의 나이가 98세이니 곧 돌아가실텐데, 미해결과제를 풀지 못하고 떠나보낼지도 모르지만 그건 엄마의 몫이다.
돕는다는 건, 돕지 않는 법을 아는 일이기도 하고, 소통은 말이나 기술이 아니라 늙음을 이해하고 침묵을 듣는 일이기도 하다. 죽음은 순간이지만 삶은 과정이고 슬픈 건 고독한 죽음이 아니라 어쩌면 외로운 삶일지 모른다. 작가님은 사람은 결국 살아온대로 죽는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 죽고, 단호한 사람은 단호하게 죽는다. 관계의 단절로 외로운 사람은 죽음조차 외로울수 밖에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책속에 영화 <씨 인사이드> 이야기가 나온다. 2007년 영화다. 안락사라는 개념을 몰랐지만, 존엄한 삶은 무엇인지 죽음조차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존엄하게 마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 영화였다.
사람들은 이유를 찾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원칙이 없기에 나에게도 주변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평소 죽음에 대해서, 늙음에 대해서 늙음으로 인한 삶의 주도권을 점점 잃어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공부를 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98세의 외할머니도 77세의 어머니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지지 않는 하루>에는 작가님의 암투병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죽음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을 잠식한다고 본다. 나의 죽음을 떠올렸을때, 나의 부모의 죽음을 떠 올렸을때 나는 어떻게 준비를하고 어떻게 떠나 보낼것인가(떠날 것인가). 어떤 감정들이 들까. 두려움, 공포, 슬픔, 분노 등등 그 감정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감정들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오랜시간 충분히 한다면 우리는 어느날 죽음이 왔을때 생각보다는 덜 당황하고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게 <오춘실의 사계절>과 <고요한 결심은 다른 성격으로 올해 최고의 책이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사유의 지혜를 잠시라도 옅볼 수 있어서 작가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