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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ngeun Sung Oct 26. 2024

교수로 산다는 것 5: 매일 글과 함께

매일 글과 함께 산다

교수로 산다는 것은 좋든 싫든 매일 글과 함께 사는 게 아닐까 싶다. 하루 보통 7.5시간 일을 하는 중에 수업이 있거나 미팅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어떤 형태로든 (보통 영어로) 글을 읽고 쓰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하루에 한두 시간이 있고, 미팅도 하루 두세 시간씩은 있는 편이니까 평균 하루 세네 시간은 읽고 쓰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을 시작해서 컴퓨터를 켜면 제일 먼저 이메일을 확인해서 읽고 답장을 쓴다 (많게는 하루 50통 이상의 이메일들이 온다). 수업 준비를 할 때는 관련 자료들, 책, 논문들을 읽으면서 수업 자료를 만든다. 논문을 쓰거나 책 집필 활동을 할 때도 비슷하게 관련 서적들이나 논문들을 많이 읽고 글을 쓴다. 학생들 프로젝트나 논문 지도를 하면 학생들이 쓴 리포트를 읽고 피드백을 적어서 보내준다. 학회나 학술지 논문 심사를 하거나 연구 제안서 심사를 할 때 논문과 제안서를 열심히 읽고 심사평을 써서 낸다. 내가 속한 단과대에서 현재 연구 윤리 위원회장(Faculty Head of Research Ethics) 역할을 맡고 있어서 우리 단과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연구들의 계획서를 윤리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일도 한다. 이외에 다른 일들도 대부분 다 문서를 읽고 검토하거나 내가 문서 작성을 하는 식으로 다 읽기 쓰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 그런데 내가 연구 중심 교수라서 이런 것 같기도 하다. 학생들 교육에만 힘쓰시는 다른 교수님들은 꼭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주가 될 것 같진 않다. 나는 다행히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업무 시간의 절반 이상을 읽기와 쓰기에 쓰는 것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다. 어떤 교수님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읽기 쓰기에 집중하는 연구 시간이 어렵거나 힘들다고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분들은 보통 책을 집필하는 일은 박사 논문이 처음이자 끝이고, 학생들 논문 지도는 하지만 본인이 직접 긴 글을 더 이상 쓰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나도 항상 길어봤자 8천 자 정도 되는 논문만 써왔었고, 편집책은 두어 번 내봤지만 장문의 글을 쓰는 것은 요새 처음 하고 있는 중이다 (학계 경력 7년이 지나 드디어). 작년 겨울에 처음 모노그래프(monograph, 단행본) 제안서를 스프링어(Springer, 학술 서적을 출판하는 해외 출판사)에 내서, 올해 6월에 계약서 사인을 하고 책을 쓰고 있는 중이다. 매일 업무 시간 중에 수업이나 미팅이 없고 다른 더 급한 일이 없으면 자투리 시간들을 써서 조금씩 쓰고 있고, 한 달에 한 챕터씩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학술적 글 읽기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평소에 학술적 논문, 책, 연구 제안서 등등을 가장 많이 읽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류의 학술적 글 읽기는 '내 취미는 독서입니다'라고 할 때의 그런 여유롭고 유유자적하는 느낌은 아니다. 보통 수업 준비를 한다면 몇 달 전부터 하는 일은 거의 없고, 보통 다음 주 수업 준비를 이번 주에 한다거나, 이번 주 목요일 수업 준비를 이번 주 화요일에 시작하게 되는 식이어서,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필요한 정보들을 찾아내어 선택적 읽기를 하고 핵심만 정리해서 수업 자료를 만드는 식이다. 그래서 수업 자료를 만들 때 책이나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 참고로, 수업 준비를 닥쳐서 하게 되는 것은 내가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새 학기에 누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학기 시작 직전에 결정이 나기도 하고, 학기가 시작이 되었는데 갑자기 수업 변경이 되기도 하며, 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매주 일정이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좀 그렇게 된다. 오해 마시길 바란다. 논문이나 책을 쓸 때 관련 논문, 책, 이외 다른 자료들을 읽을 때도 선택적 읽기를 하게 된다. 내가 하는 연구 관련 모든 논문들을 다 꼼꼼히 읽고 자세히 잘 알고 있으면 더 전문가 같고 좋겠지만, 그런 대단한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만큼 연구 시간이 많지가 않다. 그래서 보통 키워드 검색을 해서 논문들이 나오면 제목만 주욱 읽으면서 관련성이 높은 논문들을 선택하고, 그 선택된 논문들의 초록만 빠르게 읽으면서 가장 관련이 높은 논문들을 또 선택해서 그런 논문들만 좀 더 자세히 읽는 식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고 연구하는 분들 대부분이 그러실 것이다. 논문의 도입부(introduction)를 쓴다면 도입부만을 위해서 아마 대충 50-60개 정도의 논문 제목들을 검토하고, 30-40개 정도의 초록들을 읽고서, 10-20개 정도 논문들의 본문을 적당히 읽고 (샅샅이 읽는 경우는 거의 없음) 그중 부분을 인용하지 않나 싶다. 학술지나 학회지 논문, 혹은 연구비 제안서 심사를 할 때는 그나마 가장 열심히 꼼꼼히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편인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읽기의 방식은 다분히 목적성을 띄고 있고, 보통 심사 기준에 맞춰서 심사평을 쓸 수 있을 만큼 읽는 것이지 문장 하나하나를 읽는 느낌은 아니다.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학술적 글 읽기라는 것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두뇌를 최대한 가동해서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콘텐츠/텍스트를 필요에 따라 분석하고 선택하여 재생산하는 과정 (혹은 재생산하기 직전까지의 과정)에 가까운 같다.  


취미 글 읽기

매일 하는 일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이라 그런지 학기 중에는 굳이 일이 끝났는데 취미로 글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일이 끝나면 운동을 하고 넷플릭스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다른 활동을 하지, 글은 거의 읽는 일이 없다. 학기 중에 그래도 책을 읽는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런 때는 기차 이동이 길 때다. 기차를 타고 30분 이상 어디를 가야 한다거나 주말에 잠시 유럽 다른 나라에 휴가를 간다거나 하면, 그럴 때 가벼운 책 한 권을 들고 다니는 편이다. 이동 시간이나 대기 시간이 길고, 그럴 때 핸드폰을 봐도 되지만, 뭔가 기차 이동이나 여행의 낭만은 역시 책이 아닌가 싶다. 또 워낙 매일 집에서 넷플릭스를 많이 보다 보니 기차까지 타면서 그걸 계속 봐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열심히 하면 활자가 지긋지긋한 느낌에 오티티(OTT, over the top, 인터넷 미디어 콘텐츠 제공 서비스)의 저녁이 있는 일상을 보내는데, 그 일상에서 벗어날 때는 다시 활자로, 책으로 회귀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서울에 휴가를 가있는 동안에도 한글 책을 재밌게 많이 읽는 편이다. 서울집에 있을 때 휴가의 일상이란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별 일이 없으면 소파에 널브러져서 한글 책을 읽는다. 아마 점심이나 저녁에는 약속이 있거나 다른 볼일이 있어서 나갈지도 모르겠지만 나갔다 들어오면 또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읽던 책을 이어서 읽는다. 서울 울 엄마 집 마루에 있는 소파는 특히 햇빛이 잘 들어서 책을 읽기 딱 좋다. 한글 책들은 보통 자기 계발서나 경제나 심리 관련된 책들을 읽는 걸 좋아한다. 요새 한국 사람들은 어떤 자기 계발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뭘로 돈을 벌고 있는가, 어디에 투자를 하고 있는가, 무슨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 어떻게 마음 챙김을 잘하고 있는가 등등에 관심이 많다. 이런 책들을 읽다 보면 한국에 살지 않아도 한국의 사정을 좀 더 가까이 알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가끔 소설도 읽기는 하는데, 그건 추천을 받았을 때 추천을 받았으니 한번 읽어보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소설책을 사서 읽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진짜 재밌는 소설책(해리포터랄지 추리 소설)이 아닌 이상 소설을 읽고 있으면 집중이 잘 안 되고 어디에 재미를 느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 때가 많다. 소설책은 그래서 시작해서 끝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소설이 아니라면, 약속이 특별히 많거나 가족 여행을 가거나 하지 않는다면, 하루에 한 권쯤 책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무슨 책이든 한 번 읽고 더 읽을 것도 아니고, 책을 어디 쌓아둘 것도 아니라서, 서울에서 읽는 책들은 보통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사서 읽고 다 읽으면 다시 알라딘에 판다. 내가 연구 활동을 하면서 업싸이클링(upcycling)과 함께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데, 그러면서도 일상생활에서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실천을 못하고 있는 편이어서 좀 쑥스럽고 부끄러운 그런 것이 있었는데, 한글책에 있어서 만큼은 확실한 기여를 하고 있어 좀 덜 부끄럽다.   


학술적 글쓰기

내가 논문이나 책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인 것 같지는 않다. 다작을 하는 교수님들을 보면 학술지 논문을 1년에 막 5편 이상씩 내고 그러신다. 책도 막 1년에 단행본을 한 권씩 내시는 그런 교수님들이 있으시다. 아니 그게 뭐 대수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신지 모르겠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실제로 이것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다. 나도 내가 해보기 전까지는 학술지 논문을 내거나 학술 서적을 내는 것이 그렇게 어렵거나 오래 걸리는 일일 거라는 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학술지 논문을 내보니, 보통 학술지 논문을 낼만한 연구 계획을 짜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만도 최소 1년은 걸리고, 논문의 형태를 갖추어서 글을 쓰는 것도 몇 개월이 걸린다. 다 써서 드디어 학술지에 제출을 하면 편집자가 일차적으로 검토를 하고 (빠르면 한 달, 늦으면 몇 달 걸림), 검토 결과가 긍정적이면 그때 본격적인 논문 심사(peer review)에 들어가서 그 논문 심사에 또 빠르면 한 달 늦으면 몇 달이 걸린다. 보통 심사 결과가 '다 좋으니 바로 출판을 하자'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이걸 고쳐라, 저걸 고쳐라, 이걸 더 해라, 저걸 더 해라' 하는 경우가 많고,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리젝(reject, 거절)을 당하기도 한다. 리젝 된 논문은 다른 학술지를 찾아서 그 학술지의 논문 형식에 맞춰서 논문을 다시 써서 제출해야 한다. 다행히 리젝 되지 않았다면 시키는 대로 다 해서 다시 내는데 또 몇 달이 걸리고, 그러면 또 2차 심사를 한다. 2차 심사를 해서 바로 출판이 되면 정말 다행인데, 그렇지 않으면 또 수정을 해야 하고, 또다시 제출을 하고 3차 심사를 하고, 등등 생각보다 긴 여정이 될 수 있다. 평균적으로는 한두 번 수정 후에 출판이 되는 것이 대부분인 것 같다. 재수가 좋다면 첫 학술지에 논문을 낸 시점부터 시작해서 6개월에서 1년 안에 논문이 나올 수 있고, 재수가 없다면 2년, 3년도 걸릴 수 있다. 난 재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평균적으로 1년에 겨우 학술지 논문 하나를 낼까 말까이다. 책도 두 권 내봤더니 학술지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은 거 같다. 출판 제안서를 출판사에 내서 편집자로부터 리뷰를 받는데 보통 한 달은 걸리는 것 같고, 리뷰에 따라 수정한 제안서는 또 심사(peer review)에 들어가서 또 한 달 기다려야 한다. 심사 결과에 따라 제안서를 또 수정해서 내고, 그렇게 최종 제안서가 제출되면 편집자들이 미팅을 하여 최종 결정을 하는데 또 한 달이 걸린다. 그래서 출판 제안서를 제출하고서 출판 계약서에 사인하기까지 최소 3-4개월 정도 잡아야 하는 것 같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서 책을 쓰고 편집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1-2년), 다 쓴 책을 출판사에 넘기고 나서도 표지 디자인 및 실제 책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작업, 물리적인 책을 만드는 작업에 또 몇 달 걸리는 것 같다. 예를 들어 2022년 6월에 학회를 열고서 7월에 그 학회를 바탕으로 한 출판 제안서를 라웉리지(Routledge, 해외 학술 서적 출판사)에 냈었는데, 1차 수정을 8월에 했고, 2차 수정을 9월에 했으며, 계약서에 사인을 한 것은 10월이었다. 편집책에 기여하는 사람들이 글을 다 써서 제출하고, 내가 편집자로서 편집을 다 해서 출판사에 넘긴 것은 1년 뒤인 2023년 10월이었다. 출판사에서 퇴고와 1차 편집 작업을 끝내서 보내준 것은 2023년 12월이었고, 내가 바로 확인을 하고 제작에 들어가서 실제로 책이 나온 것은 2024년 4월이었다. 제안서를 쓰는 과정에서부터 출판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지금 쓰고 있는 단행본도 2023년 12월에 처음 제안서를 제출했고, 올해 6월에 계약서 사인을 하고서 2025년 12월에 제출이니까 2026년 하반기 즈음 책이 나오는 3년 프로젝트다. 그러니까 매해 논문이 5개가 나오고 책이 한 권씩 나오려면 엄청난 다작과 멀티태스킹과 프로젝트 매니지먼트를 겁나게 잘하고 있어야 한다. 논문을 혼자 쓴다면 하나 다 써놓고 좀 쉬었다 다음 걸 쓰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여러 개를 쉬는 기간 없이 항상 쓰고 있는 것이다. 박사생들이나 연구원들이 많아서 그들이 같이 쓰고 있는 것이라면, 훌륭한 박사생들과 연구원들을 그만큼 많이 뽑을 수 있게 연구비를 많이 딴 능력자인 것이다. 책도 매년 한 권이 나오려면 한 권 집필을 하고 있는 중에 이미 다음 책 제안서를 쓰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런 능력자가 아니라서, 논문을 낼 때는 논문을 내고 책을 낼 때는 책을 낸다. 일 년에 논문이든 책이든 하나 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힘든 것 같다. 연구비를 주면서 논문이랑 책만 내라고 하면 그나마 좀 더 다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연구비를 따서 새로운 연구를 해서 논문이든 책이든 써야 하니까 다작이 쉽지가 않다. 연구비를 따기 위해 연구 제안서를 쓰는데 드는 시간이, 논문이나 책을 쓰는데 드는 시간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드는 것 같다. 올해 여름에도 가장 열심히 쓰고 있었던 것은 연구 제안서였고, 9월에 그 연구 제안서를 제출하고 나서 또 새로운 연구 제안서를 열심히 쓰고 있는 중이다. 가장 최근에는 그래서 시간이 날 때 단행본 쓰기와 함께 연구 제안서 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매일 뭘 아무튼 쓰고 있기는 하다. 근데 보통 혼자 열심히 쓰고 있으니까 그 결실을 맺기까지 좀 오래 걸릴 뿐이다. 어서 우리 훌륭한 박사생들님이 무럭무럭 자라서 학회 논문 말고 학술지 논문들도 열심히 잘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혼자 고군분투해서 일 년에 겨우 하나 학술지 논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박사생들과 함께 일 년에 5개씩 논문을 내는 다작하는 교수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나의 첫 번째 박사생이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고, 두 번째 박사생도 박사 논문을 내년 초까지 다 쓴다고 하니, 앞으로 1-2년 안에 적어도 학술지 논문 한두 개는 박사생들과 같이 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개인적 글쓰기

원래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편인 거 같다. 좋아하는 건지 단순한 습관인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슨 기록이든 평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많이 하는 편인 거 같다. 업무용 다이어리에 매일 내가 몇 시에 무슨 수업이 있고, 무슨 미팅이 있나, 오늘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실제로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를 기록한다. 업무용 다이어리 이외에 개인 다이어리가 따로 있는데, 거기에는 매일의 생활과 그에 대한 감상이나 감정 상태에 대해서 간단히 적어 놓는다. 뭐가 좋았다거나, 나빴다거나, 힘들었다거나, 즐거웠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비공개 인스타그램에는 어디 여행을 가거나, 공연을 보거나, 전시를 보거나, 특별히 맛있는 걸 먹거나, 날씨가 좋아서 갑자기 학교 캠퍼스나 동네가 예뻐 보이거나 하면 사진들을 찍어서 올려놓는다. 비공개인 고등학교 동문들만 가입할 수 있는 게시판 같은 것에 개인 게시판도 있어서 종종 이런저런 단편적인 기록들을 한다. 업무용 다이어리에 할 일들이 가득 적혀 있고, 하루가 끝나갈 때 즈음에 그걸 다 해낸 (형펜으로 다 했다고 칠해 놓은) 스스로를 보면 뿌듯함이 있다. 개인 다이어리는 5년 치 기록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것이고, 올해 처음 쓰기 시작해서 지금 당장은 큰 재미가 있지는 않지만 내년부터는 재밌을 것 같다. 작년의 나는 오늘 날짜에 이런 걸 했었구나,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하고 읽으면서 오늘을 기록하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는 것은 그야말로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기록인 것 같다. 나의 기억과 추억 외장 메모리 같은 느낌으로. 지금 당장보다 20-30년 즈음 지났을 때 옛날 앨범을 꺼내 보듯이 본다면 더 의미 있는 사진들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까지 인스타그램이 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비공개 게시판에 적는 단편적인 기록들은 보통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같은 것들이다. 내 게시판을 읽는 동문들은 10-30명 정도 되는데, 내가 고등학교 동문들과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아니고, 게시판의 모든 글들은 50일이 지나면 다 안 보이게 설정을 해놔서 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를 하더라도, 감정 쓰레기통처럼 쓰더라도, 50일만 지나면 다 사라지는 걸 아니까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항상 많은 기록을 하면서 살아오고 있지만 모든 기록들은 짧고 단편적이고, 한글로 정제된 긴 글을 써본 것은 아마도 고등학생 때 논술 준비를 할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이렇게 한글 에세이를 두 달 전인 8월에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과연 잘 쓸 수 있을까, 재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두 달째 매일 놀라워하는 중이다. 하루 종일 영어를 읽고 쓰고 듣고 말하다가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보면 너무 재밌는 거와 마찬가지로, 한글로 글을 쓰는 것도 비슷하게 아주 재밌는 것 같다. 이렇게 재밌을 줄 알았으면 진작 한글 글쓰기를 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원래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들 하지 않는가. 마흔이 넘어 찾은 취미 생활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재미있게 계속 한글 글을 써나가고 싶다. 기왕 쓰는 거 나만 재밌고 즐거운 글쓰기가 아니라 읽는 사람들에게도 어떤 도움이 되거나 영감이 되는 글들을 많이 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지금 당장 잘 쓰는 글은 아니지만 다작을 하다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지겠지 싶다. 그때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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