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박사를 하면 좋은가?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잘 맞는 사람에게는 좋다. 아니 이런 무슨 너무 당연한 얘기를 왜 하나 싶으실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 조금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시면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영국에서 하든 한국에서 하든 어디가 되었든 간에 아무튼 박사를 하면 좋은가 라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에는, 이미 해본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는 굳이 안 해도 된다면 안 하고 사는 게 더 낫다는 입장부터 밝혀두고 싶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을 위한 책을 쓸 수도 있으니, 그 논의는 여기서 굳이 하지 않겠다.이 글에서의 가정은 '누군가가 박사를 이미 하고 싶어 한다' 혹은 '누군가가 박사를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이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영국에서 박사를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실생활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을 잡지식을 늘리는데 관심이 있기를 바란다(제발).
다시 말하지만, 잘만 맞는다면 박사를 영국에서 하는 것은 좋다. 좋을 수 있다. 나는 아주 잘 맞는 건 아니었지만 적당히 맞는 것들이 있어서 전반적으로 좋았던 거 같다. '잘 맞는다'와 '좋다'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을 테니, 여기서 내가 설명하는 것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들임을 미리 알아두셨으면 좋겠다. 내 기준에서 '잘 맞는다'는 것은, 박사 학위를 받고자 하는 연구 주제와 잘 맞고, 연구 방법과도 잘 맞고, 연구를 하는 연구실과 (있다면), 학과와, 학교와, 지도교수들과 잘 맞는 것이다. 영국의 날씨와, 음식, 사람들과잘 맞으면 더 좋다. 내 기준에서 '좋다'는 것은, 영국에서의 박사 과정이 가성비가 좋고, 시간의 효율이 좋고, 박사 하는 과정 중과 이후의 기회의 폭이 넓고 좋다 정도이다. 가성비가 좋음은, (보통 가장 많이 유학을 가는) 미국과 비교해서 학비와 생활비가 좀 싸다는 건데, 물론 런던 생활비는 예외다. 시간의 효율이 좋은 것은, 영국 박사는 기본 4년(대부분의 전 세계 대학들이 그러함)이 아니라 3년이기 때문에 제때에 졸업할 수만 있다면 1년의 시간 절약이 가능하다. 제때 졸업하면 1년 치 학비와 생활비도 절약할 수 있다. 박사 과정 중과 이후 기회의 폭이 넓고 좋은 것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가장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한국이나 미국 대비) 박사 장학금이 많은데, 특히나 국내외를 통틀어 장학금이 거의 없는 디자인 분야랄지 여러 예체능 분야들에도 장학금이 꽤나 있는 편이다 (참고로, 박사 장학금 검색은 https://www.findaphd.com/ 에서 할 수 있다). 나도 감사하게도 크게 어렵지 않게 디자인 분야 박사 장학금을 받아서 학위를 할 수 있었다. 박사를 하는 중에 학부생들과 석사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고, 연구원들(포닥들)과 같이 일할 기회도 있었으며, 내가 하는 개인 연구 이외에 더 크고 다양한 프로젝트들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여러 대학과 학과들과 함께 하는 콘소티엄(consortium)에서 다학제적 공동연구를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경험할 수 있었고, 콘소티엄 안의 정기적인 작은 세미나들과 학회들을 통해 다양한 교수님들, 포닥들, 박사생들이 하는 연구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나도 내 연구에 대해 정기적으로 공유하면서 발표하는 연습도 꾸준히 할 수 있었다.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또 운 좋게도 같은 학교 안에서 연구원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박사 졸업식 전까지 연구원으로 일을 하면서 여기저기 교수 자리에 지원을 할 수 있었다. 연구원 자리는 본인과 지도교수에게 의지만 있으면 내부 연구비나 외부 연구비를 써서 1년 계약직 같은 자리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고, 교수 자리도 한국에 비교해서 절대적인 자리의 숫자가 5-10배 이상 많다는 것도 지원서를 넣으면서 알 수 있었다(참고로, 영국의 교수나 연구원 구인 공고는https://www.jobs.ac.uk에서 대부분 검색이 가능하다). 나 같은 경우 2013년 10월에 박사를 시작해서 2016년 연말에 논문을 제출하고, 2017년 1월부터 1년 계약직 연구원 일을 시작했는데, 4월에 논문 디펜스를 하고, 7월에 졸업식을 할 때 디몬포트 대학(De Montfort University)에서 교수자리 인터뷰를 하고 취업이 바로 되어서 연구원 1년 계약을 채우지 않고 그만두고 2017년 9월부터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이렇게 빨리 졸업을 하고, 비는 시간 없이 연구원 일도 하고, 졸업식과 동시에 교수로 취업하는 경우가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많을 것 같지않다. 내가 특별히 운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이게 다 영국에서 박사를 했으니까 가능했던 시나리오라 생각한다. 어느 다른 나라에서라면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운 좋게 잘 풀렸다고 자랑질하고 있네,라고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같은 연구실에서 같이 박사나 포닥을했던 대부분의 친구들과 동료들도 다 운 좋게 잘 풀렸다. 주변에 다른 영국 학교 출신 박사님들도보면 대부분 다 그럭저럭잘 되신 거 같다. 아주 이상하게, 잘 못 되었다는 얘기를 어디 멀리 서라도 들은 적은 없다. 그러니까 딱히 통계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대충 확률적으로 나쁘지 않은,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에서 박사를 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나의 개인적 의견에 공감을 좀 하신다면, 이제 '잘 맞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드려도 되지 않을까 싶다. 연구 주제와 방법, 연구실, 학과, 학교, 지도교수들과 잘 맞아야 좋은 것은 굳이 영국이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에서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사항들이고,대충 보아도 아주 중요한 요소들임을 이미 다들 눈치채셨으리라 생각한다. 영국의 날씨, 음식, 사람들은 영국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요인들이라 여기는데, 누군가들에게는 또 엄청나게 중요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하나씩 설명을 더 자세히 하면서 개인적 경험들을 공유해 보고자 하는데,나의 개인적인 경험이 평균적이거나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주변의 몇몇 다른 박사 친구들이나 교수 친구들(주로 영국과 한국 거주)과 대화를 해본 결과, 내가 했던 경험들이 아주 특수한 경험들도 아님을 미리 알려드린다.
연구 주제와 잘 맞음
나 같은 경우에는 운이 좋게도 내가 평소 관심있어하던 분야(친환경, 지속가능한 디자인)에 하필이면 박사장학금이 있었다.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던 분야여서 박사 장학금 신청서나 연구 제안서를 쓰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고, 지원했더니 또 감사하게도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영국에는 박사 장학금의 기회가 생각보다 굉장히 많기 때문에 여러분도 혹시 영국에서 박사 장학금을 받아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딱히 자랑할 거리는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시면, 혹시라도 부끄러운 상황에 처하는 것을 미리 방지할 수 있다). 연구 주제에 대한 평균 이상의 관심과 애착이 있으니, 박사 과정 하는 동안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어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연구 주제가 딱히 나와 잘 맞지 않았다면 어려움들을 느끼면서 어느 순간 그만둬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연구 주제는 아주 신중하게 잘 선택하는 것을 추천해 드린다. 박사를 시작하고 특정 연구 주제를 정했는데 그 분야를 파볼수록 주제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너무 늦지 않는 선에서 (1년 안에) 정말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주제로 변경하는 것이 좋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익히 들어 아시겠지만, 박사라는 것은 3-4년이 아니라 까딱하면 7-8년, 어쩌면 10년도 넘게 걸려 버리는 아주 위험한 함정이나 수렁처럼 될 수도 있는 것이다(심지어 결국엔 졸업을 못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분야 연구에 몇 년의 인생을 허비하면 대단히 허망하고 슬플 것도 같은데,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니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은 좀 알려주시면 좋겠다. 박사를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이런 고민을 애초에 시작하지 않아도 되니, 사실 그것이 제일 좋다.
연구 방법과 잘 맞음
연구 방법이라고 하면 전공별로 정말 다양할 텐데, 나는 박사를 시작했던 그 당시(2013년), 어쩐지 인간에 대한 연구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서, 사회과학(social science) 쪽의 방법론을 채택했었다. 연구 계획을 짤 때는 인터뷰를 한다든지, 온라인 설문을 하는 등의 방법들이 내 적성에 잘 맞는지 큰 확신은 없었는데, 하면서 보니 별 어려움 없이 내가 그럭저럭 잘 해낼 수 있는 일들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영국의 다양한 도시들을 방문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연구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떠듬떠듬한 영어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다양한 도시들을 방문하는 여행이 좋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만남도 좋았고, 수다를 떠는 것도 좋았고, 이렇게 신나고 즐거운데 이게 공부고 일이라는 것도 좋았다. 온라인 설문지 분석을 위한 통계 프로그램(SPSS, Statistical Package for Social Sciences)은 처음에 배우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한번 쓰는 방법을 깨우치고 나니, 통계를 쓰는 것만큼 논문을 쉽고 빠르게 쓸 수 있는 방법이 또 없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중고등학교 내내 수학 공부를 참 많이 하고 열심히 했었는데, 대학 전공을 디자인으로 가면서 솔직히, '아니 그동안 수학은 왜 그렇게 열심히 하고, 수학 학원은 왜 그렇게 비싼 돈을 내고 많이 다녔지' 싶었었다. 그런데 박사를 하면서 통계를 쓰니 어릴 적 수학 공부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성적을 내기 위함만은 아니었구나, 하고 내 학창 시절의 일부가 좀 더 정당화되고 유익한 시간으로 재해석되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새로운 기술을 쓰거나, 무언가를 만들거나, 어떤 실험을 하거나 하는 식의 다른 연구 방법들을 썼다면, 1년 만에 모든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 가능했을까 싶다. 어쩌면 나는 연구라는 것은 전혀 내 적성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연구 방법이 내 적성에 잘 맞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나요,라고 혹시 묻고 싶은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연구 방법론 책을 한두 권 읽다 보면 '이건 내가 해봤지', '저건 좀 들어봤다', '이건 그냥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등등의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적합한 방법들 몇 가지를 써서소소하게 작은 파일럿(pilot) 연구(본연구 전에 시험 삼아 작게 해 보는 연구)들을 좀 해보면서 간을 볼 수도 있다. 박사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이런 생각은 다 쓸데없는 고민이니그게 제일 마음 편하고 좋다.
연구실과 잘 맞음
모든 박사생들이 연구실 소속이 되는 것은 아닐 텐데 (이를 테면 나도 박사생이 5명 있지만 박사생들이 소속된 연구실이 있지는 않다), 내가 박사를 했던 때에 내 첫 번째 지도교수는지속가능한 소비 연구실(Sustainable Consumption Research Group)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 연구실 소속이었다. 그 연구실에는 연구원들(포닥)이 대여섯 명 있었고, 박사생도 나까지 포함해서 대여섯 명이었다. 다들 비슷한 분야 연구를 하니 매일 서로 할 말도 많고 도움도 주고받고 심심할 새가 없었다. 그중 몇몇은 지금까지도 친한 친구,공동연구자, 혹은 같은 학교 동료로서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때 당시에는 연구실 소속이라 다 좋기만 한건 아니었지만 (이를테면 너무 잦은 미팅),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연구실 환경에 있었어서 행운이었다 생각한다. 내가 하는 분야의 연구와 잘 맞지 않는 연구실 소속이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연구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면, 박사과정 내내 좀 고립된 느낌을 받거나 가뜩이나 외국에서 혼자 외로운데 더 외로움을 느꼈을 것도 같고, 배움의 기회가 확실히 더 제한적이었을 듯하다. 그러나 혹시라도 연구실이 없거나 연구실에서 낙동강 오리알 같은 존재처럼 느껴질지라도 전혀 속상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연구실이 없거나 연구실과 상관없이 내 갈 길을 가는 박사생인 나를 다시 상상해 보니,더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감 넘치고 여유롭고 유유자적하는 학자가 되었을 것도 같다. 그리고 학계나 학교에 대해서 좀 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기대, 더 큰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나는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으므로 이런 경험이 있으신 박사님들의 제보를 바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연구실이 좋을까, 연구실이 없어도 과연 괜찮을까, 하는 불필요한 고민을 안 해도 되는 전혀 관심이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학과와 잘 맞음
내가 소속했던 연구실에서 하는 연구들은 소비자 연구(consumer research)에 가까웠지만, 소속 단과대(School of Architecture, Design and the Built Environment)가 디자인과(나의 학부와 석사 전공)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박사를 하는 중에 디자인과 학부생 논문 지도를 하거나 석사생 수업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고, 그런 경험들은 졸업 후에 교수로 취업할 때와 교수가 되었을 때 다도움이 되었다. 당시 같은 학교 디자인과 교수들과도 친분을 쌓을 기회들이 있었는데, 요새 가끔 학회나 각종 행사들에서 마주치면 아주 반갑다. 종종 박사 논문 심사라든가 하는 식으로 대외적인 일도 부탁을 받을 때가 있고, 협업을 도모하는 교류들도 하고 있다. 디자인과가 없는, 혹은 디자인과와 상관없는단과대 소속이었다면 어쩌면 박사 졸업 후에 디자인과 교수로 자리 잡기에는 조금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르겠다.물론, 박사 이후에 교수를 직업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어느 학과에서 박사를 하느냐가 전혀 상관이 없을 것도 같다. 또, 학부부터 박사까지 디자인 전공을 했는데 경영대나 공대교수가 되거나, 석사까지 경영 전공을 하고서 디자인 박사를 한 뒤에 다시 경영대 교수가 된 친구들도 봤다. 언젠가부터 워낙 융합 연구를 하는 것이 인기가 있고 유용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박사를 하는 학과는 잘 맞으면 도움이 될 수도 있는데, 잘 안 맞아도 별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아닌듯하다.
학교와 잘 맞음
내가 박사를 했던 곳은 영국의 노팅엄 트렌트 대학(Nottingham Trent University)이라는 곳이었는데,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처음 듣는 대학교이름일 거라 장담한다.나또한 박사 장학금 신청을 할 때 처음으로 이 대학의 이름과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인지도가 낮으니 한국의 지인들에게 이런 대학에서 박사를 하고 있다는 설명을 할 때마다 조금 곤란한 느낌을 받았다. 학교 이름을 말하면 '그 학교는 어디 있는 거냐', '노팅엄이 어디냐'라고 묻기 일쑤니, 지정학적으로 노팅엄이 영국의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런던으로부터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 도시인가부터 시작해서, 역사적으로는 로빈후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도시라는 설명에 이르기까지 일장연설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옥스퍼드나 캠브릿지 대학이라고 했다면 다들 '우와' 하는 반응과 함께 대략 3초면 넘어갔을 법도 한데, 나는 보통 10분은 설명을 해야했다. 매번 수고스럽게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에는 거의 아무도 학교 이름을 기억해 주지는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런 귀찮음과 어쩐지 궁색함, 그리고 본의 아니게 학교 홍보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홍보가 되고 있는 것도 아닌, 그런 시간 낭비스러움을 제외하고는 나는 학교 자체에 불만은 없었다. 학교의 랭킹은 중상위권이면 나쁘지 않다 생각했고, 박사장학금으로 등록금을 내주시고 생활비도 주신다는데 학교 이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싶었다. 노팅엄 트랜트 대학교는 캠퍼스가 노팅엄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데, 디자인과 건물은시내의 중심에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연구를 하다가 혹은 논문을 쓰다가 필요하면 잠시 시내에 나가서 쇼핑을 할 수도 있었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술을 한 잔 마시러 가기에 아주 적합했다. 누군가에게는 대학 랭킹이 제일 중요할 수있고, 누군가에게는 런던에 위치한 대학이라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연구시설과 환경의 우수함이 유일한 대학 평가 잣대일 수도 있다. 나는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가 정해졌고, 그 선택의 여지가 없음에, 그리고 정해진 학교에대해 다행히 별 불만이 없었다. 한국에 좀 더 잘 알려져 있고 대학 순위가 더 높고 더 우수한 대학교에서 박사를 했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면, 지인들에게 대학 설명을 주저리 주저리 하지 않아도 되는 간편함이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학교의 명성과 주변인들의 너무 빛나고 훌륭함 때문에 오히려 내가 좀 위축되고, 초조함이나 불안감을 느끼거나, 다소 자신감을 잃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노팅엄 트렌트 대학은 내 분수에 맞는 학교였고, 그러니까 장학금도 어렵지 않게 받았고, 졸업 전에 연구원 일도 바로 이어서 할 수 있었으며, 학교에 있는 내내 마치 내가 굉장히 똑똑하고 명석한 학생인 것만 같은 즐거운 착각도 잠시 누렸다. 그러니 혹시나 이름을 잘 모르는 대학교에 가게 되더라도 너무 실망하거나 상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내 깜냥에 맞고 적당히 좋은 대학에 가면, 더 많은 기회가 있을 수 있고, 너무 경쟁적이거나 각박하지 않은, 나름 편안하고 여유로운 박사 생활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역시 박사 학교는 어디를 가야 좋을까 고민할 이유가 하등 없는 상황(박사에 전혀 관심 없음)이 제일 좋을 것 같다.
지도교수들과 잘 맞음
영국은 박사 지도교수가 한 명만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보통 둘이나 셋이다. 나도 두 명의 지도교수님들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지도교수님들과 그다지 잘 맞지가 않았고, 지도교수님 두 분도 서로 그다지 잘 맞아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지도 교수인 남자분(팀 Tim)과는 도저히 맞는 것 같지 않아서 박사를 시작한 첫 해에 혹시 지도교수 변경이 가능한가 여기저기 문의를 해보았는데, 박사 장학금이 첫 번째 지도교수로부터 나오는 거였기 때문에 지도교수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동안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졸업을 해버리고 말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되는 좋은 동기 부여가 되었다.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는 것들도 생기고, 팀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 비례해 인간적으로 친해지기도 하고, 졸업을 할 때가 되어서는 팀을 '성격이 맞지 않는 것일 뿐, 같이 일하기에 크게 나쁘지 않은 사람' 정도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졸업을 하고 나서 팀은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준 고마운 사람'이 되었고, 내가 교수로 일하면서는 내 박사생들 지도가 쉽지 않아서인지 '그렇게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논문 지도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참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두 번째 지도교수인 여자분(사라 Sarah)은 몇 차례 첫 번째 지도교수와 열띈 토론을 하고 의견의 충돌을 겪는가 하더니 언젠가부터 지도 미팅에 자주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메일로 가끔 피드백을 주거나 조언을 주기는 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전반적으로는 미팅을 하던, 미팅 없이 피드백(feedback)을 받건 항상 스트레스가 있었다. 특히나 잘 알아보지도 못하게 갈겨쓴 손글씨 피드백을 종이에 받으면 특별히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동안은 어떤 느낌이었냐면, 지도교수들이 내 박사 과정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들처럼 여겨졌다. 물론 지금은 그게 내가 다 그당시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인내심이 많고, 배우려는 낮은 자세가 갖추어져 있고, 좀 더 성숙한 인간이었다면, 그 모든 것들이 훨씬 더 견딜만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제 때에 졸업을 하고 학위를 받았으니 지도교수들과 잘 맞고 안 맞고는 생각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지도교수는 나와 맞고 안 맞고와 상관없이 지도 능력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 (사람 스트레스는 좀 받을지언정). 다른 영국 박사님들 얘기를 들어보면 나만큼 지도교수들과 잘 맞지 않은 사람이 없는 듯한데, 그래서 그분들이 다들 3년 만에 제때 졸업을 했느냐면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분들은 박사를 하는 동안 나보다 훨씬 더 만족감과 행복감이 높으셨을 것 같다. 좀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박사 생활을 위해서는 성향이 잘 맞는 지도 교수들을 만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더라도 학위는 제때에 받을 수 있는 것 같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도교수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면 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겠거니 생각하거나, 아니면 인내심을 기르는 수련과 성숙의 기회 정도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도교수와 잘 안 맞으면 어쩌지 노심초사하거나, 아니면 지도교수와 잘 안 맞아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 자체(박사를 고려함)를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영국의 날씨와 잘 맞음
영국의 날씨는 안 좋은 것으로 유명하니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지만, 혹시나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좀 드리고자 한다. 영국의 날씨는 여름철에는 기온이 높지 않고 겨울철에도 기온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연교차가 적은 온난한 기후, 서안 해양성 기후이다. 이렇게만 들으면 꽤나 좋은 날씨인 거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쾌적하나 여름 같지 않은 여름
2013년부터 지난 11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실제로 여름에 28도를 넘게 올라가는 날들이 별로 없었고, 아무리 밖에는 30도가 넘어도 집안에 들어오면 실내 온도는 보통 25도 밑을 유지했다. 집에는 선풍기 하나 없지만 덥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중부지방 우리 집 기준). 여름에 영국에서 모기를 본 적도, 물린 적도 없다. 더위를 많이 타고 모기에 물리면 무섭게 부어서 피부과를 가야 하는 체질인 나로서는 영국의 여름이 정말 마음에 든다. 단점이라면 여름 일교차가 커서 낮에 25도라 하면 아침과 밤으로는 10도 가까이 떨어져서 추울 지경이라는 점이다. 나는 보통 7월까지도 전기장판을 틀고 잔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기간은 가장 따뜻한 8월의 1-2주 정도려나. 쾌적하기는 한데 뭔가 여름이 여름답지 않아서 아쉬움이 있다. 여름에는 땀을 뻘뻘 흘리다가 시원한 수박, 냉면, 아이스크림, 팥빙수 같은 것들을 먹는 것이 또 맛이지 않은가. 영국인들이 농담 삼아하는 표현에 의하면 영국은 1년 365일이 '겨울이거나, 겨울 같거나(It's winter or it's like winter)'이니 도통 여름의 낭만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영국은 정말 박사를 하기에 좋지 않은 곳이다.
생각보다 춥고 집이 따뜻하지 않은 겨울
겨울에도 영하로는 잘 떨어지지 않아서 영국에 살면서 눈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중부지방 기준). 그러면 포근하고 좋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는 분들이 있으실 텐데, 그것은 현실과는 거리가 좀 있다. 거의 매일 비가 오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체감 온도가 훨씬 더 낮고, 뭔가 기분 나쁘게 으슬으슬 추운 것이 있다. 게다가 한국의 집들과 건물들은 겨울에 실내에서 반팔을 입어도 될 만큼 따듯하게 난방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국은 그렇게 따뜻하게 난방을 하지 않는다. 난방을 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못하는 것에 가까울 것 같다. 영국에는 오래된 집들이 정말 많고, 그런 오래된 집들은 열효율이 낮으며, 전반적으로 난방비가 비싸서 한국의 온돌집만큼 따뜻하게 하고 지내려면 한 달에 몇십만 원, 혹은 백만 원까지도 난방비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100년은 된 오래된 곳이라서 열효율이 그다지 높지 않고(A-G 중에 C), 가스 중앙난방 시스템이 아니라 전기 라디에이터를 써서(가스보다 전기가 비쌈) 겨울에 실내 온도 19도를 가까스로 맞추는 것만으로도 난방비가 가뿐하게 매달 30만 원은 나온다 (30평 기준). 난방비를 30만 원을 내면서도 마치 한국에서의 80년대와 같이 집에서 내복을 입고 스웨터를 입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털 실내화를 신고 지낸다. 이런 뭔가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적 생활을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다면, 열효율이 높은 신축,기왕이면 천정이 낮고 되도록 작은 평수 집에 살면서 난방비에 좀 더 투자를 해야 한다. 나도 열효율이 높은 집으로이사를 가서 가스 난방을 하면서 조금 더 따뜻한 실내 겨울 생활을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는 그냥 겨울에는 겨울을 오롯이 느끼면서 여름의 고마움을 되새기는 기회로 삼고, 다 좋을 수는 없다는 인생의 교훈을 몸소 체험하는 어떤 수행자의 기분으로 지난 11년의 겨울을 보내왔다. 추위에 좀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혹은 이사를 현명하게 진작에 잘했다면, 아니면 매달 100만 원 난방비를 써도 아무렇지 않은 경제능력과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영국에서의 겨울 생활이 더 안락하고 즐거웠을 것 같다. 겨울에 집에서 반팔티를 입고 지내는 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면, 내복과 털양말과 털실내화를 신고 실내 생활을 하는 것이 어쩐지 굴욕적으로 느껴진다면, 영국에서 박사를 하는 것은 예상치 못하게 아주 번거롭거나 비싼 일이 될수 있다.
사시사철 잦은 비와 적은 일조량
온도와 별개로 일조량의 문제도 있다. 영국은 여름이 건기라서 여름에는 해가 쨍쨍하고 날씨가 좋은데, 이 건기는 6월과 9월 사이 정도이고, 그때만 제외하고는 사시사철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가끔 태풍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이외에는 장마철이라는 것이 없이보통 하루 건너 하루 비가 찔끔찔끔 내리는 식이다. 하루 안에서도 해가 떴다가 비가 왔다가 다시 해가 떴다 비가 왔다 하는 식이라, 가방에는 거의 365일 선글라스와 우산을 같이 들고 다닌다. 겨울이 본격적인 우기라서 비가 보통 매일 같이 조금이라도 오는 식인데, 겨울이라 낮시간이 짧으니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느낌이다. 나는 피부가 건조한 편이라 비가 자주 와서 습도가 높은 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하필 햇빛 알레르기도 있어서, 항상 비가 많이 오고 흐린 편인 영국에 있으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선크림을 덧바르지 않아도 되고 피부에 신경을 덜 쓸 수 있어서 편하다. 다만 파란 하늘을 보지 못한 채로 몇 주가 지나면 본의 아니게 우울한 기분이 슬며시 들 수 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하여 영국에 사는 거주자들은 다들 비타민D를 매일 열심히 섭취한다. 영국에 있는 유학생들로부터첫겨울을 보내는 것이 힘들(었)다는 경험담들을 많이 들어왔다. 나는 석사를 영국의 옆동네 네덜란드에서 했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와서 그런지 그냥 그런갑다 싶었다. 하지만네덜란드에서 석사 할 때 첫가을학기에 나도 굉장히 우울하고 술을 많이 마셨던 기억이 난다. 본인이 날씨에 의해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성향이 강하다면, 영국에서 박사는 굳이 하지마시라고 권유해 드리고 싶다. 날씨 좋은 여름에 여행을 가시거나 아니면 1년 석사를 하는 정도는 견딜만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박사는 날씨가좋은 다른 나라에서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영국의 음식과 잘 맞음
영국은 또 음식이 맛없는 걸로 유명한데, 사실 식당 음식들이다 맛이 없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 서울에 맛집들이 밀집해 있고, 세계 어딘가에 맛있는 것이 있다고 하면 누군가가 서울에 그 식당을 열고, 지방 맛집 음식들도 서울에서 다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영국에서도 런던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런던에서는 서울과 같이 돈만 있으면 아주 다양하게 맛있는 맛집들에서 전 세계의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요새 런던에는 정말 맛있는 한식집들과 한국식 간식집들도 많이 늘어났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런던을 벗어나서도 대도시들(이를테면 맨체스터 Manchester, 버밍햄 Birmingham, 리즈 Leeds)에는 좀 더 식당과 식재료의 다양성이 있고, 중소도시로 갈수록 선택의 폭이 줄어드는 것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어쩔 수 없다. 식당선택의 폭이 도시별로 차이가 나는 것 이외에 식당들이 다 맛이 없는 건 아니니,영국 음식이 맛이 없다는 말은 아마도 영국식 음식이나 영국의 전통적 집밥이 별로 맛이 없다는 얘기에 가까울 것 같다. 영국의 전통적인 집밥이라고 하면 고기와 야채, 감자, 빵 등을 오븐에 구워서 그레이비 gravy소스를 부어 먹는 그런 것일 텐데, 나도 영국인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몇 번 먹어봤지만 아주 건강식이고 건강해지는 맛이었다. 영국식(피시앤칩스 fish and chips랄지 고기파이 등등)을파는 식당들도 여러 군데 가보았으나 어디도 그리 맛이 있진 않았다. 영국인들도 본인들의 음식이 그리 맛이 없다는 걸 알고, 이탈리안이라든가(파스타, 피자 등) 인도 카레 등을 많이 해 먹거나사 먹는 걸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전반적으로영국인들은 한국인들만큼 맛있는 음식을 먹는 데에 그렇게 열심이거나 열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내 주변 영국인 동료들이나 친구들을 보면, 특히 직장에서 점심을 먹을 때는 생존을 위해, 칼로리를 채우기 위해,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마치 어떤 몸의 생리적인 필요의 충족을 위한 목적성만을 가지고 밥을 먹는 것처럼, (내 눈에는) 많이 맛이 없어 보이는 것들(치즈샌드위치, 구운 감자, 야채수프 따위)을 반복적으로 먹는 것에 전혀 불만이 없어들 보인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맛집들이 늘어났고 여전히 늘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음식이 맛없는 나라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없어지지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제 좀 '맛잘알이 적은 나라' 정도로 바뀌어도 되지 않나 싶다.
돈이 많거나 요리를 열심히 하거나 대충 먹거나
내가 박사를 하며 거주했던 노팅엄은 중소도시지만 다행히도 괜찮은 식당, 카페, 디저트집, 펍들이 굉장히 많아서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에는 주변 도시 사람들도 몰려가는 곳이다. 괜찮은 한식당들도 여러 개 있고, 아주 큰 오리엔탈(oriental) 슈퍼마켓도 있어서 한식재료를 구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한식재료를 가까운 데서 구할 수 있는 슈퍼가 없더라도 요새는 H Mart(https://hmart.co.uk/shop/ko/)가 워낙 잘 되어있어서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배달시키면 된다. 작은 도시로 갈수록 외식을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줄어들고, 배달 문화는 더 제한적이지만,본인이 요리를 잘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나도 요리를 잘하지는 못하는데 박사 하는 동안에는 먹고살겠다고 요리책들을 열심히 보면서 다양한 파스타와 카레를 만들어 먹었었다. 한식도 가끔 해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게 잘하지는 못했다. 한식당에 자주 가고 싶었지만 가난한 박사생이었던 나에게 외식비는 너무 비싸서(이를테면 김밥 한 줄에 2만 원)가고 싶은 만큼 자주 가지는 못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이 부자거나 본인이 부자여서부유한 박사생이 될 수 있다면 런던이나 대도시의 학교에 가서 비싸고 맛있는 것들을 잘 먹고 지내면서 힘내서 공부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돈이 별로 없는데 남 부럽지 않게 잘 먹고살면서 박사 공부를 하고 싶으면 시간 날 때 한식을 비롯하여 본인이 좋아하는 요리들을 좀 배워보시라고 추천해드리고 싶다. 부자도 아니고 요리에 취미도 적성도 없는 분이라면 기왕 영국에서 거주하는 거, 영국인들과 비슷한 마음가짐(칼로리와 영양소만 챙겨 대충 먹기)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다이어트가 저절로 될 것이다. 나는 부자도 아니고 요리도 귀찮고 그렇지만 매일 맛있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매주 맛집을 찾아다니며 외식을 3-4회 하지 않으면 도저히 공부가 잘 될 것 같지 않다 싶으시면 영국에서 박사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영국 사람들과 잘 맞음
영국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서 장문을 썼다가 지웠다. 써놓고 보니, 내가 영국 사람들이라고 싸잡아서 어떤 새로운 스테레오타입을 만들거나 아니면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테레오타입이라는 것은 다들 아시겠지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떤 한 개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어떤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멋대로 판단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이를테면 저 사람은 영국인이라는데 전혀 행동이 그렇지가 않군 이라든가). 나 또한 동양인 여자 스테레오타입(조용함, 순종적임)의 피해자 중의 한 명이라, 스테레오타입을 만드는/강화시키는 글이란 정말 좋지 않다 생각한다. 세상의 어디를 가도 좋은 사람들이 있고 나쁜 사람들도 있고 훌륭한 사람들이 있는 한편 못난 사람들도 있고 멋진 사람들이 있고 이상한 사람들도 있는 것처럼, 영국도 그렇다. 사람사는 곳이 어디나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이다. 여러분들도 영국에 직접 가셔서 경험해 보시기 바란다. 영국 생활 11년차이지만 내향인(MBTI의 I)이라 나는 그렇게 영국에서 영국인들과 (혹은 다른 한국인들과 기타 외국인들과도) 많이 어울리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박사를 할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별 큰 문제없이, 큰 이질감 없이, 나름 영국인들과 잘 섞여서 사회생활을 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한 일은 영국인들은 어떨 때 어떻게 하나 행동과 말을 잘 관찰하면서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하고, 믿을 만한 영국인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얻기도 한 것이었다. 어쩌다 잘못하면 이상하고 무례한 영국인을 따라 하게 되거나 되도 않는 조언대로 행동하게 될 수도 있으니, 첫 몇 달은 좀 여러분들 기준에서 멀쩡해 보이고 마음에 드는 여러 명을 관찰하면서 다양한 데이터를 쌓기를 추천드린다. 사실 박사 과정에 매진하다 보면 딱히 사회생활이라 할만한 일들을 할 기회가 많지가 않다. 책과 컴퓨터 모니터 화면과 함께 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고, 인간과의 접점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 대부분의 박사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까 박사 지도교수들과의 관계만 좋으면 나머지 영국인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심지어 지도교수들과 잘 맞지 않아도 (나도 그랬고) 박사 졸업과는 별 상관이 없다. 본인이 엄청나게 외향인(MBTI의 E)이고,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잘 맞는 것이 아주 중요하더라도, 박사를 하면서 내향인으로 변할 확률도 높다. 나 또한 영국에서 살고 박사를 하면서 혼자 읽고 쓰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집이 점점 좋아지고, 에너지가 점점 떨어지면서, 원래 외향인이었지만내향인으로 스리슬쩍 변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해지는 시점이라고 여겨지는 때가 온다면, 그때 박사 공부를 하는 마음으로 영국인 (관찰) 공부를 조금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