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Kyungeun Sung
Sep 24. 2024
영국에서 뭘 하면 재밌나?
찾아보면 재밌는 건 많다. 그러나...
영국에서 뭘 하면 재밌나? 찾아보면 재밌는 건 많다. 스포츠 관람을 좋아하면 윔블던(Wimbledon) 테니스나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 축구를 경기장에 가서 보면 얼마나 현장감 넘치고 재밌을 것인가. 역사에 관심이 많으면 세계사 교과서에서만 보던 유물들과 유적지들을 실제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겠는가. 미술과 예술을 좋아한다면 미술책에서나 보던 명작들을 실물로, 대부분 다 공짜로 볼 수 있어 좋을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면 유럽의 어느 나라로든 여행을 다니기에 영국만큼 좋은 나라도 없다. 뮤지컬과 다양한 공연들을 즐긴다면 아마 뉴욕 브로드웨이(Broadway in New York City) 다음으로 런던이 최고의 도시가 아닐까. 어릴 때 해리포터를 좋아했다면 (그리고 지금도 좋아한다면) 해리포터 스튜디오 방문도 하고, 해리포터 뮤지컬도 보고, 영화 촬영지들도 방문하면 성공한 덕후 같은 뿌듯함이 밀려올지 모른다. 음식을 좋아하면 영국의 곳곳에서 전 세계의 다양한 음식들을 스트리트푸드(street food)부터 파인다이닝(fine dining)까지 다 즐길 수 있다. 요리나 제빵을 좋아한다면 관련된 TV쇼와 책들이 넘쳐나고, 커다란 오븐이 빌트인(built-in)으로 들어가 있지 않은 집이 거의 없으니 본격적인 오븐 요리와 베이킹을 하기 좋다. 술을 즐긴다면 동네별로 특색이 넘치는 맥주(보통 에일 ale)나 사이다(cider)를 맛본다거나, 펍투어를 한다거나, 양조장들을 방문하면 재밌을 테고, 특히 와인을 좋아한다면 와인 전문가들의 꿈인 마스터 오브 와인(Master of Wine) 시험 준비를 해보는 것도 특별하고 의미 있을 것이다. 운동을 좋아하면 어느 도시에나 거의 5-10분 간격으로 널려 있는 스포츠센터, 피트니스센터, 요가센터, 댄스교실 등등을 골라 가는 재미가 있다. 영국 어느 도시에나 공원들이 많고 잘 되어 있으니, 산책이나 달리기, 자전거를 좋아한다면 매일 공원을 바꿔가며 조금씩 더 멀리 있는 공원에 가보는 것도 재밌을 수 있다. 무언가 새로운 취미를 만들고 싶거나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가지고 싶다면, 각 도시마다 여러 가지 양질의 수업들을 비교적 저렴한 수업료에 제공하는 문화센터나 평생교육센터 등의 시설들이 잘 되어 있다. 취미 생활을 함께 할 친구들을 찾는다면 도시마다 다양한 동호회와 모임들도 많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없는 건 없다.
개인마다 다른 재미의 기준
그러나 이렇게 재밌는 것들이 많다고 해서 내가 다 재미를 느낀다는 보장은 없다. 이를테면 나는 테니스나 축구, 이외 모든 스포츠 경기 관람에 관심이 없어서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나한테 운동은 하는 거지 보는 게 아니다. 가끔 올림픽 경기를 보면 한국 선수들이 뭘 잘할 때 좀 재밌고 신나긴 한데, 그 이외에는 무슨 재미로 봐야 하는 건지 관전 포인트를 잘 모르겠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열렬한 축구팬들(서포트하는 축구팀 티셔츠를 입고 있음)이 보이기라도 하면 최대한 멀리 도망치기 바쁘다. 영국의 축구팬들 중에는 꼭 훌리건(hooligan, 스포츠에 열광하여 폭도화하는 관중이나 팬)이 아니더라도 술에 취했거나 시끄럽거나 무례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자주 목격했어서 아무래도 조심하게 된다. 원래 축구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영국에 와서 축구팬들로부터의 잠재적 위험을 감지하고서 더 관심이 떨어졌다. 또 다른 예로는 재봉이 있다. 뭔가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취미를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작년(2023년) 가을에 레스터(Leicester) 시에서 운영하는 성인교육센터(Leicester Adult Education)에서 뭘 배워볼까 하고 웹사이트를 찾아봤다. 원래 듣고 싶었던 수업은 도자기공예였는데 이미 신청자수가 꽉 차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담으로 이번에도 도자기공예 초보반 신청을 시도해 봤는데 2024년 9월에 신청하는데 제일 빨리 들어갈 수 있는 수업이 2025년 4월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거라도 신청했다. 이 동네 사람들의 도자기공예 관심이 아주 지대하다. 아무튼 2023년 그 당시에는 들을 수 있는 수업들 중에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재봉 초보자반 수업을 선택했었다. 영국하면 또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함께 유럽의 패션 강국 중 하나가 아니던가. 패션 강국 영국에서 재봉을 배우면 내가 입고 싶은 옷들을 다 만들어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아마추어 같은 허황된 꿈을 잠시 꾸고 있었다. 재봉 수업은 대학교 수업처럼 한 학기(3개월) 수업이었는데 그럴싸한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이 아주 친절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수업료도 1주일에 한번 2시간씩 3개월(10주)에 10만 원 정도로 굉장히 저렴했다. 재밌으면 초급반 수업을 듣고서 중급반 수업도 이어서 듣고 재봉틀도 사서 집에서도 하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재밌진 않았다. 나는 내가 그래도 제품 디자인과 교수니까 같은 디자인 계열인 패션 디자인도 나름 적성이 잘 맞지 않을까 싶었는데, 제품과 패션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전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내가 해서 재밌지 않은 것을 하나 더 찾아낸 것에 의미가 있는 좋은 시간이었지 않나 싶다.
재미와 상관없는 지속(불)가능함
또 어떤 것들은 재미가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할 수 없게 되는 것들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박사 할 때 살았던 집에 오븐이 아주 크고 좋은 게 있길래 별생각 없이 제빵을 해봤는데, 하다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좀 심취했더랬다. 내가 원래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닌데 레시피대로만 따라 하면 빵집에서 파는 것 같은 고퀄의 빵, 케이크, 과자가 만들어지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갓 구운 빵이나 과자 냄새가 집안에 퍼지는 것이 기분 좋았고, 방금 구운 빵과 과자는 따뜻할 때 먹는 것이 어찌나 맛있는지 내가 만들어 놓고도 항상 감동하면서 먹었다. 메리 베리(Mary Berry, 영국의 가장 유명한 제빵사이자 요리사 중의 한 명) 베이킹 책들을 사모았고, 책에 있는 모든 레시피를 시도해 보았으며, 설탕과 버터를 줄이면서 맛을 유지하는 건강한 나만의 레시피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박사를 하는 동안 베이킹을 거의 매주 하면서 살이 아주 포동포동 올랐었다(어흑). 살이 너무 쪄버린 것도 있었지만, 박사 졸업을 하고 일을 시작하면서 바빠지니, 베이킹이고 자시고 할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자연스레 베이킹을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은 가끔 남이 만들어 놓은 맛있는 케이크, 빵, 과자를 먹는 정도로 만족한다. 안 해 버릇하니까 이제는 도통 귀찮아서 베이킹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또 다른 예는 발레다. 몇 년 전 무슨 계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발레를 배워보면 어떨까 싶어서 성인 취미 발레 수업을 들었었다. 매주 혹은 매달 다른 동작을 배우거나 점점 어렵고 복잡한 동작들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재밌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는 느낌과 성취감이 있는 것도 좋았다. 근데 몇 달 초급반에서 일취월장하고서 중급반에 갔더니 그때부터 포인트 슈즈(point shoes, 혹은 toe shoes토슈즈, 발끝으로 설 수 있게 해주는 발끝이 단단한 신발)를 신으라는 거다. 원래 관절이 별로 안 좋고 특히 발목이 좋지 않은 나로서는 발끝으로 서는 단계부터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천년만년 초급반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아서 취미 발레를 그만뒀다. 안타까운 일이다.
무슨 시도든 다 좋은 경험
재봉, 제빵, 발레 이외에도 지난 11년간 영국에서 재밌을 것 같은 것들을 꽤나 많이 시도를 해봤었다: 박물관, 미술관, 유럽 여행, 뮤지컬 및 각종 공연들, 해리포터, 펍투어와 양조장 방문, 다양한 운동, 동호회와 모임들. 해리포터 스튜디오는 해리포터를 좋아하는 서울 친구가 놀러 왔을 때 같이 갔었는데 재밌었고, 해리포터를 딱히 좋아하지 않아도 가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모두에게 추천한다. 해리포터 촬영을 했다는 런던 기차역, 옥스퍼드 대학, 요크(York) 구경을 갔을 때도 신기하고 재밌었다. 다만 해리포터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아서, 뮤지컬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해리포터 뮤지컬은 보지 않았고, 다른 해리포터 영화 촬영지들도 굳이 가진 않았다. 펍투어는 박사 할 때 영국인 친구들이 가자 그래서 몇 번 같이 해봤는데 딱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술은 자고로 조용한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조곤조곤 대화를 하면서 마셔야 즐겁지, 새로운 맥주를 맛보자고 너무 시끄러운 펍에 간다거나 하면 스트레스가 컸다. 술맛 구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다양한 맥주를 마신다고 미묘한 맛 차이를 느끼는 것도 아니고, 술을 잘 마시는 것도 아니고, 숙취도 심한 편이라, 뭐 굳이 펍투어까지 하나 싶었다. 양조장은 아일랜드(Ireland) 더블린(Dublin)의 기네스(Guinness) 양조장 및 체험관, 에든버러(Edinburgh) 위스키 양조장 및 박물관, 프랑스와 스페인 몇몇 도시에서 와인과 샴페인 양조장 몇 군데를 가봤는데, 물론 다 재밌었다. 그렇지만 여행을 갔는데 마침 있으니까 간 거지 양조장 방문이 여행 목적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운동은 공원 산책, 자전거 타기, 수영, 아쿠아로빅, 웨이트, 핫요가, 일반요가, 필라테스, 삼바, 줌바, 킥복싱, 등등 다 해보았는데 뭘 해봐도 딱 마음에 드는 운동이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발레는 정말 재밌는 운동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공원들은 너무 많이 가서 이제 운동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고, 자전거도 한동안 열심히 타고 다녔더니 안 가본 길, 새로운 동네를 개척하는 즐거움이 사라졌다. 수영과 아쿠아로빅은 집에서 제일 가까운 수영장이 우리 학교 시설이라, 수영장 안에서 몇 번 학생들과 마주친 이후로는 뭔가 민망하고 신경 쓰여서 못 가겠다. 웨이트는 PT(Personal Training)를 받아도 반복이 지겹고 관절이 안 좋아서 무게를 늘리는 재미도 없으니 운동 효과도 적고 별로인 거 같다. 핫요가는 재미는 있었으나 (내 땀냄새 포함) 사람들 땀 냄새가 불쾌해서 못하겠고, 일반 요가와 필라테스도 동작이 익숙해지면 지루해서 한두 달 이상 못하겠다. 삼바는 신나기는 했는데 너무 신나서 그 에너지를 내가 못 따라가겠어서 그만뒀고, 줌바와 킥복싱은 재밌고 좋은데 안타깝게도 동네에 줌바와 킥복싱만 따로 하는 곳이 없다. 그래서 요새는 보통 두세 달 짐(gym)을 끊고 거기서 하는 다양한 수업들(줌바, 필라테스, 요가, 웨이트, 서킷 트레이닝, 사이클 등등)을 듣다가 수업들이 반복적이고 재미 없어진다 싶으면 짐을 바꾼다. 일 년에 3-4개의 짐을 돌려가며 다니니 좀 덜 지루하고 좋은 것 같다. 동호회와 모임들은 몇 년 전 이것저것 몇 번 나가봤는데 내가 별다른 취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런지 (그리고 내가 살짝 내향형 인간이라 그런지) 무엇 하나 지속적으로 나가게 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는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해보면서 좋은 인생 경험들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안/덜 좋아하는 사람인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좋은 기회들이었다.
제일 좋은 건 집에서 널브러져 멍 때리기
그나마 시도해 본 것들 중에 꾸준히 재밌고 신나고 지금까지도 계속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것들은 박물관, 미술관, 유적지, 교회, 성당, 성들 구경 다니는 것과, 뮤지컬이나 연극, 마술쇼, 스탠드업 코미디 등의 공연들을 보는 것, 그리고 가보지 않은 미지의 유럽 도시들로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좀 돈이 들고 시간도 써야 하는 취미 생활들이라, 취미 생활이라고 부르기엔 그렇게 자주 하는 느낌은 아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런던이나 다른 도시에 놀러 가면 안 가본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을 구경 다니고, 집 가까이 공연장(Curve Theatre)에 공연을 보러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며, 한 달에 한 번 주말에 랜덤 유럽 나라 도시에 놀러를 간다. 그러면 한 달 30일 중에 실제로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은 5일 정도밖에 안 된다. 대부분의 날들엔 딱히 취미 생활이란 것이 없다. 운동은 아프지 않고 건강할 만큼만 월화수목 저녁에 최소한(1시간 남짓)만 의무감을 가지고 하는 편이고, 운동이 너무 재밌어 죽겠다는 마음은 거의 들지 않는다 (가끔 줌바 수업 정도 재밌을까). 지루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돈과 에너지가 별로 들지 않고 집에서 거의 매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취미 생활이 없을까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찾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책 읽는 것이 일이 아니었을 때는 독서가 취미이고 활자 중독인가 싶게 뭔가를 항상 읽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읽고 검토하고 평가하는 것이 주된 일이 되어버리니 일을 할 때는 취미 독서를 하게 되질 않는다. 휴가에 서울집에 가서 있을 때는 한글로 된 책들을 아주 재미나게 읽어제끼기도 하는데 그건 그때만 잠시 그렇다. 영국에서는 일이 끝나면 책을 손에 들고 싶은 마음조차 잘 들지 않는다. 한국에 있든 영국에 있든 평소(한 달 중 약 25일)에 제일 좋아하고 즐기는,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란 집에 널브러져 있는 건 거 같다. 서울에 있으면 널브러져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영국에 있으면 널브러져서 넷xx스나 유x브를 본다. 날씨가 좋으면 그냥 창밖을 보면서 멍을 때리기도 한다. 그러면 내가 너무 비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짧고 소중한 한 번 사는 인생을 허비하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약간의 죄책감이 들 때도 가끔 있긴 하지만 역시 제일 좋은 것은 집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뒹구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 한글로 글쓰기를 새로운 취미로 시작한 지 이제 한 달 즈음되려고 하는데, 제법 재밌는 것 같다. 매일 평소 하는 일이 영어로 읽고 쓰는 일이라 한글로 글 쓰는 걸 취미로 하면 과연 재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대단히 재미가 있다. 글쓰기가 아주 적성에 잘 맞는 것이다. 이걸 얼마나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1년 즈음 지나고 나면 알게 되리라.
가장 지속적인 재미를 주는 건 역시 일
집에서 널브러져 있는 것이 최고의 휴식인 것은 확실하나, 그것은 떨어진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가까운 것 같다. 에너지를 쓰면서 액티브하게 재미를 느끼는 여가/취미 생활(박물관, 미술관, 공연, 여행)이라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면 족한 것 같고, 그 이상 많이 할 시간도, 에너지도, 돈도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뭔가 노는 것의 재미란 좀 한시적인 느낌을 받는다. 이를테면 여행을 가면 어디를 가든 아주 최악인 곳이 아닌 이상 신나고 재밌는데, 아무리 신나고 재밌어도 나에게(더 엄밀히 말해 내 저질 체력에) 가장 적합한 관광은 1.5일 정도인 것 같다. 보통 하루 신나게 잘 놀고 나면 금세 피곤해지는데, 자고 일어난다고 그 피로가 다 풀리는 게 아니니까, 다음 날이 되면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나의 여행 일정은 대게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출발해서 저녁에 도착하고, 토요일 하루 관광을 하고, 일요일에는 너무 늦기 전에 집에 가는 식이다. 어디로 여행을 가든 한번 가봤으니 되었다 싶지, 너무 좋아서 한번 더 오고 싶다고 느끼는 일은 거의 없다. 아무리 좋은 데를 다녀와도 여행에서 돌아와 집에 도착하면 '역시 집이 제일 좋다'라고 느낀다. 뮤지컬이나 연극, 발레, 마술 등의 공연들을 보면 50%의 확률로 재미가 있거나 실망스러울 수 있는데, 재미가 있더라도 공연을 보는 딱 그 순간뿐인 거 같다. 자고 일어나면 공연에서 느낀 감동 같은 것들은 금세 다 사라져 버린다. 맛있는 것, 새로운 것들을 먹어도 다 그 순간 잠깐 즐겁고 재밌을 뿐이지 무엇 하나 여운이 길게 가는 것은 없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솔직히 말해서 일이 제일 재밌는 거 같기도 하다. 교수로 일하는 것이 언제부터 그렇게 재밌는 일이었냐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시작부터 교수로 일하는 게 제일 재밌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나도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노는 게 제일 재밌었다. 지금도 노는 것이 재밌고 좋긴 한데, 계속 놀고 있으면 재미가 줄어들거나 없어지거나, 어떤 덧없음이나 허망함을 느끼거나, 피곤함이 재미를 압도하는 상태가 된다. 나이가 들고 체력이 떨어져서 더 그런 거 같다. 일만큼 크게 에너지를 쓰지 않고, 돈도 쓰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것이 있으며, 보람차고 뿌듯함을 느끼면서, 지속가능한 재미를 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일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고, 뭐든지 배우거나 깨달음이 있고, 안 해본 일들을 해보는 것이 재미나고 좋다. 뭐가 되었든 결과가 나오고, 논문이 나오고, 책이 나오면 또 뭔가 남는 게 있는 거 같아 뿌듯함이 있고,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어떻게라도 도움이 되면 보람차고 기분이 좋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월요일에 일할 것이 살짝 기대되는 스펀지밥(SpongeBob SquarePants, 애니메이션 캐릭터인데 Thank Gosh It's Monday월요일이라 감사하다는 노래를 부름)처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된 지 좀 된 거 같다. 일이 제일 재미있다니 대체 얼마나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냐,라고 누군가는 불쌍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불쌍하게 생각해서 적선을 해주시거나 밥이라도 한 끼 사주시고 싶으신 분은 꼭 연락 주시길 바란다 (기다리고 있겠어요!). 개인적으로는 내가 지금 하는 일과 적성이 잘 맞고 재밌어해서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주중 기준으로 하루에 눈떠 있는 시간 중 가장 긴데, 일이 재미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근데 또 일이 재미있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업무 시간(보통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이상으로 일을 더 할 수 있는 체력이 없다. 저질 체력이라 몸을 움직이고 체력을 쓰면서 노는 것도 힘든데,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은 더 힘들다. 가끔 열정이 불타올라 야근을 좀 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많이 힘들다거나,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아프다거나, 아니면 눈다래끼가 생기려고 했다. 머리로는 이 정도 야근은 해도 괜찮은 거 아닌가 싶은데, 자꾸 몸이 반응을 해버리니까 이제 야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언젠가부터 아주 적당히 일하고 매일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주말마다 놀러 나가는 삶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유럽에 오래 살면 어쩔 수 없이 좀 유러피안 라이프 스타일이 점점 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영국과 한국
영국에서 이게 재밌네, 저게 재밌네 아무리 해봤자 솔직히 한국이 재밌는 게 더 많고 심심할 새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같이 박사를 하고 지금은 연세대학교에 교수로 있는 지인이, '한국은 재미난 지옥이고 영국은 지루한 천국이다' 같은 류의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한국이 지옥이라거나 영국이 천국이라는 표현은 좀 극단적이긴 한데, 그 뉘앙스가 뭔지는 알겠다. 서울에 휴가를 가면 확실히 신나고 재밌고 북적북적하고 다이내믹하고 좋은데, 어떤 대도시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왕왕 있다. 런던은 한 달에 한 번 가끔 놀러 가면 좋은데 거기서 매일 살 수는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아마 그 지인도 나처럼 서울 태생이지만 한적한 시골 생활이 더 잘 맞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영국 중소도시(예전 살던 곳은 노팅엄 Nottingham, 지금 사는 곳은 레스터 Leicester)의 생활이란 보통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를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환경이라고 할만한 것이란 거의 없고, 스트레스 지수가 전반적으로 낮아서 개복치 같은 나로서는 이런 극한의 평화로움이 좋긴 하다. 그렇지만 원래 가장 좋은 휴가란 뭔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어떤 시간들을 보내다가 떠나는 그런 것이 가장 꿀맛인 것이 아니던가. 영국에서는 그런 휴가 느낌이 아닌 것 같다. 영국에서의 휴가란 너무 평화롭고 편안하고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무료함과 지루함에서 잠시 벗어나는 어떤 일탈 같은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평소 안 하던 것들을 하고, 평소 안 가던 곳들을 가고, 그러기 위해서 계획을 짜고, 어떤 위험들을 고수하고, 아드레날린이 뿜뿜 하는, 그런 작은 모험 같은 것이 될 때가 많다. 1-2주에 한 번 정도 이런 일탈, 혹은 모험이 없으면 삶이 너무 단순한 느낌이다. 누군가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삶을 단순화하라고도 하는데, 영국(중소도시)에서의 삶이란 그 단순함의 정도가 좀 지나친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을 아는 그런 생활들이 반복된다. 아 물론 영국 안에서 개개인의 가정사나 친척 관계, 교우 관계 등등 다양한 인간관계들에 따라서 역할들의 복잡함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이외에 매일의 생활은 다 굉장히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대체로 평화롭게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화롭고 좋은데, 좀 너무 평화로워서 지루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서울에 휴가를 가있을 때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그다지 심심할 새가 없다. 너무 조용하지 않고 너무 평화롭지 않고, 그러니까 지루할 새가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동네 마트에 장 보러 나갔다만 와도 이미 엄청난 일을 한 것만 같고, 하루에 내가 만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람들을 이미 다 만난 거 같으며, 하루에 내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단어를 다 말한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머지 시간에는 계속 집에서 널브러져서 책을 읽거나 TV를 보거나 멍을 때려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서울집에 있을 때 더 집에서 널브러져 있는 시간이 긴 거 같다. 그러다가 영국에 돌아오면 평화로움과 지루함의 어느 경계에서 자꾸 어디로 놀러를 가고, 누구를 만나고, 뭐라도 하게 된다. 영국에서는 아주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이 아깝지 않게 알차게 잘 쓰는 편이다. 그래서 확실한 건 내가 좀 덜 인생을 허비하고, 더 건강한 생활을 하며, 더 쓸데가 있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영국에 사는 게 맞지 않나 싶다. 한국에서도 지방 중소도시 어딘가에서 살면 비슷할까 싶기도 하다. 그건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해보고서 비슷한지 알려드리겠다.